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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자료 등이 소실됐다.
지난해 12월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자료 등이 소실됐다. ⓒ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항쟁지도부 대변인이었으며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저항군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지난해 말 화재로 소실돼 유가족 등이 복원에 나섰지만 비용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윤상원 열사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상징적 인물로, 그를 기리기위해 '윤상원상', '윤상원 문학상' 등이 제정되기도 했지만 그의 생가는 5·18 관련 유적지 혹은 사적지도 아니어서 법 제도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윤상원 열사의 아버지 윤석동(78)씨는 생가 복원을 위해 광주지방보훈청을 찾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윤석동씨는 보훈청에 비용 지원 등을 요청했으나 "건축물이 완전히 멸실된 경우에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국가유공자등예우 및 지원에 관한법률' 등에 따르면 보훈 대상자의 생가가 화재로 인해 완전 멸실될 경우 최고 3천만원까지 지원이 가능하고 일부 소실의 경우 개량자금이 연리 3% 6백만원이 가능하다.

생가복원추진위 구성... 모금운동 전개 '아직은' 역부족

이처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되자 전남대 총동창회와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가 복원 비용 모금에 팔을 걷어붙였다.

전남대 총동창회는 2월말까지 1100만원을 모금하기로 했다. 전남대 총동창회 한 관계자는 "현재 모금 상황으로는 목표치를 넘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복원 비용은 3500여만원으로, 유가족과 관련 단체들은 매년 5월이면 국내외 취재진과 순례단이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방문하고 있어, 최소한 5월 초순까지는 모두 복원해야 하는 탓에 마음이 바쁘다.

이에 따라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가 주도해 '윤상원 열사 생가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 모금운동과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추진위에는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를 비롯, 5월의 빛, 들불동우회, 조선대 민주동우회, 광주불교연대 등 13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정재호 추진위원장은 "전문가등에게 문의한 결과 생가복원에 3500여만원이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행정기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윤 열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자료 전시실을 마련해 역사 체험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추진위원장은 "전남대총동창회의 모금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많은 분들이 문의를 해오고 있고, 그 동안 추진위 구성이 마무리돼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와 관련 5·18관련 단체 등은 "웅장한 기념물을 새롭게 만드는 것에 너무 치중하지 말고 5·18 관련 사적지와 유적 등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필요하다"면서 "정부는 정부대로 관련 법률을 보완하고 광주시 등 지방자치단체는 조례 등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신룡마을에 소재한 윤상원 열사의 생가는 지난해 12월 11일 저녁 7시경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생가 일부가 소실됐다. 이날 화재로 윤 열사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서적과 가구 및 윤 열사가 입었던 옷가지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 집에서는 윤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활하고 있다.

"사적지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 정책 필요"
[인터뷰] 정재호 생가복원 추진위원장

▲ 정재호 추진위원장
- 보훈청에서 복원 비용을 지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법규정 문제다. 보훈대상자의 경우 주택 전체가 파손돼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일부 파손될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 일반인들은 윤상원 열사 생가면 5·18 사적지로 지정되어서 지원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광주항쟁 관련자의 생가가 사적지로 지정된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안다. 사적지 지정에 있어서 직접적인 항쟁의 장소 등은 사적지로 지정하지만 열사들의 생가처럼 '간접적'인 공간은 아예 대상이 아니다."

- 5·18 사적지와 기념사업의 방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사적지 등에 대한 보존과 관리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것보다는 새로운 상징물을 건립하는데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같다. 그렇지만 이런 건립물 역시 사후에는 관리가 소홀한 것 같다.

그리고 관리·보존의 대상도 사람이나 주요 서책, 자료 등은 빠진 채, 특정 공간이나 건물에 한정되어 있다. 즉, 인간의 경험과 기억, 자료에 대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공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적지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보존정책의 부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 생가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윤 열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윤상원열사와 박기순열사(윤상원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린 들불야학의 노동열사) 관련 자료를 모아 자료전시실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곳을 역사체험 및 학습공간으로 꾸밀 생각이다. 자료전시실은 광주항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될 것으로 본다."

- 현재까지 전남대 동창회와 추진위에 답지된 모금액은.
"전남대총동창회의 모금운동은 1100만원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추진위에 많은 분들이 문의해 오고 있고 금액 약정도 하고 있다. 현재 모금액은 500만원 정도다. 그동안 '추진위' 구성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모금액수는 크게 많아 질 것이다."

- 화재로 인해 윤상원열사와 관련된 자료가 어느 정도 유실됐나.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60%∼70% 정도 유실됐다. 살아남은 자료 또한 불에 타고 물에 젖었기 때문에 자료의 수명이 매우 짧아졌다. 그리고 많은 자료의 유실로 인해 윤상원열사의 지적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와 함께, 광주항쟁 당시 윤상원열사의 지적 편린을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됐다. 추진위는 성금 모금 뿐 아니라 두 열사의 관련자료도 수집하고 있다."

- 생가복원을 하는데 행정기관과 협의하고 있나.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자체장 및 관계자들과 만나 협조를 요청할 것이다."

- 모금운동에만 의존할 경우, 복원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 시민모금은 금액 측면에서 다소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생가 복원사업은 단순히 모금운동만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라진 광주항쟁 사적지에 대한 복원 작업인 동시에, 문화중심도시 건설담론 창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가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와 그 의미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불탔다는 소식에 모든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복원 이야기가 나오자 '특정인을 영웅시하는 것 아니냐',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보아 광주항쟁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물에 대한 연구 부재로부터 기인한다. 또한 이는 기존 정신계승사업의 허약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광주항쟁에서 윤상원 열사는 대중들의 저항이 수습 수준에서 좌초될 위기에 놓였을 때, 대중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해 내기 위해 대중투쟁을 선도했다. 광주항쟁을 민주화 투쟁사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동력으로 만든 핵심인물 중의 한 명이다. 이런 역할을 해낸 윤상원 열사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생가가 갖는 의미는 한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이해하는 한 통로이고, 광주항쟁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이며, 이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윤상원열사의 생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정신계승사업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많은 시민들의 동참이 있기를 바란다."


80년 5월 '투사회보' 제작, 시민군의 대변인 윤상원

▲ 윤상원 열사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윤상원은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78년 광주로 내려와 양동신협에 다니던 이듬해 '들불야학' 1기 강학을 실시했다. 들불야학에 함께 했던 이들은 이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윤상원은 당시 김영철, 박용준, 김길만, 박용규, 서동주, 한태근 등과 함께 야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5·18항쟁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강학들은 항쟁당시 유일하게 시민들에게 항쟁의 실상을 들려줬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던 중 윤상원은 일부의 무기반납주장에 반대하면서 항쟁지도부를 규합, 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 5월 26일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서른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가족 등은 망월묘역에 묻힌 그를 지난 1982년 박기순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치러줬으며 1997년 신묘역 조성으로 신묘역(국립5·18묘지)로 이장됐다. 한편 지난해 8월 영화 제작사 CS브라더스와 기획시대는 "최근 윤 열사의 유족으로부터 영화화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면서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항쟁 10일간의 역사를 영화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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