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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복원 기본계획도
홍주성복원 기본계획도 ⓒ 홍성군
이 성은 지방비 1278억 2800만원과 국비 2945만 8800만원 등 모두 4316억 7600만원을 투입, 올해부터 2024년까지 20년 동안 단기계획(2005∼209년), 중기계획(2010년∼2014년), 장기계획(2015년∼2024년)에 따라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20-2번지 사적231홍주성 지정구역과 이직 지정되지 않은 북문까지 모두 17만 9780입방미터(5만4384평)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다.

'홍주성 복원기본계획'을 세운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의 기본계획에 따르면 조양문과 동헌, 여하정(연못), 잔존성곽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아, 책실, 급창방, 사령청, 내삼문, 전영동헌, 관노청, 군기고, 군기청 등 관아의 27채의 모든 건물이 빠짐없이 복원된다. 성내에는 또 민속마을, 체험공간, 특산물 매장, 놀이마등 등과 홍주역사관, 민속마당 등이 만들어진다.

성곽도 보수, 복원해 현재 남아있는 810미터의 성곽을 보수하고 962미터를 복원 성곽길이가 1772미터가 옛 모습을 그대로 되찾게 된다. 구한 말 격동의 와중에서 불타 없어진 서문루와 북문루, 남문도 원형복원된다.

홍주성내의 연못 안에 지은 정자인 여하정
홍주성내의 연못 안에 지은 정자인 여하정 ⓒ 홍성군 자료사진
새로 조성되는 역사교육공간에는 서문과 남문 사이의 성곽 밖에 만들어 세운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등의 흉상을 남산 공원지역으로 이전 정비하고 병오항일기념비, 한용운 시비, 김좌진 장군비 주변을 정리하고 홍주성 수성비는 원래 위치인 동문 앞으로 이전한다.

홍주성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의 읍성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조선시대 이전부터 축성되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은 고종7년(1870년)에 당시 목사였던 한응필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동문(조양문), 서문(경의문), 북문(망화문)의 편액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동학혁명 때 남문이 훼손되고 서문과 북문이 모두 불타 없어졌을 때, 동문의 편액도 함께 불타 없어졌다.

1920년대의 홍주성 아문
1920년대의 홍주성 아문 ⓒ 홍성군 기록사진
홍주성이 결정적인 훼손을 당한 것은 전국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이 성안에서 거병하는 것을 시작으로 병오의병으로 이어지자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헌 등 몇 개의 관아건물만 남겨놓고 모두 헐어버리거나 일본사람들에게 팔고, 관아건물 앞에 군청건물을 세우면서 부터다.

일제는 이후 이도 부족하다고 여겨 홍주라는 지명을 강등시켜 홍성으로 만들고 성곽까지 헐어내려 민족자존을 잘라버리려 했다. 조선시대 후기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의 한 곳으로 진영이 설치돼 내포지역 10개 고을을 관장하는 위세를 떨쳤었다. 이후 성내에는 법원, 검찰청, 읍사무소, 홍주초등학교, 민가건물 등이 들어서 옛 모습을 잃은 채 100여 년을 내려오고 있다.

홍성군 관계자는 "홍주성은 우리 나라 읍성 중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나 일제시대 훼손된 이후 대부분의 유적이 소실되고 공공기관, 민가 등이 들어서 있어 역사적 가치를 상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발굴조사와 문헌, 고지도 등을 통해 원형복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홍주성의 동헌인 안회당
홍주성의 동헌인 안회당 ⓒ 홍성군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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