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은 조선 중기 때부터 번성한 마을로 안동의 화회마을과 더불어 영남지역 양반 문화를 직접 볼 수 있는 고택들이 운집해 있어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신라 문화재가 워낙 각광을 받은 탓일까? 경주시 외곽지에 있는 양동마을의 조선 문화재는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적어 보인다.
앞으로, 양동마을 가치가 널리 알려져 빼어난 문화유산으로 빛날 수 있도록 후손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기대해 본다. 경상북도는 1월에 "전통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111억 원을 투입해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벌여 체험·관광마을로 육성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5백년 전통을 이은 양동마을은 마을 주산인 설창산에서 뻗어내려 온 네 줄기 산등성이와 각 골짜기에 자연과 잘 조화시킨 주택 건축으로 인해 마을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1992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마을을 방문 할 정도로 조선시대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마을로 대외적으로 정평이 난 곳이기도 하다.
양동마을은 조선 중종 때 영남감사를 역임한 유학자 이언적과 1467년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운 배민공 후손들이 공동으로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더불어 유학자 이언적 등이 후학을 양성하여 이후, 이황 조식 등으로 명맥을 이은 영남 사림파의 산실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양동마을은 양반집과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150여 호 주택들이 산등성이 위·아래로 배치돼 조선시대 전통가옥 구조와 계급사회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회마을이 낙동강 상류가 휘감은 평지에 주택을 세운 데 비해, 양동마을은 산등성이에 집을 지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양반집 양식인 동남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일반적 격식을 탈피한 가옥의 실내구조도 특이하며 산 능선과 골짜기에 마을을 조성하고 산등성이에는 주로 양반집을 배치하고 그 아래쪽은 민가를 지은 마을모습이다.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양동마을 산등성이는 탁 트인 동남향으로 경주 쪽을 훤히 볼 수 있고 설창산에서 서쪽으로 안강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안락천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형세이다. 즉,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을 전체가 명당자리란 설명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양반가옥이 배산임수의 남향집인데 비해 이곳은 설창산(雪倉山)을 주봉으로 하여 말 물(沕)자처럼 뻗어 내린 분통골, 안골, 장태골 등 네 갈래로 뻗은 구릉과 골 따라 자리를 잡아 집을 지었던 것이다.
경사지면 경사진 대로 자연스럽게 그 지형을 이용해 집을 지으니 평지에 지은 대저택에서 보이는 위압감은 줄어든다. 오히려, 양동마을 주택은 정겨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사지의 건축 작업은 평지보다 더 많은 재원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축대를 쌓는데 많은 석재가 들 것이며, 자재운반이나 숙련기술 등 남다른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안강, 기계지역 넓은 농토와 풍부한 영일만 해산물은 양동마을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당시, 양동마을의 영향력은 인근 지역 뿐만 아니라 북쪽 흥해지역으로까지 미치었다고 한다.
양동민속마을 건축에 쓰인 돌의 양과 종류로 볼 때, 양동마을 양반들은 동해안 세도가 였음이 짐작된다. 그러면, 저렇게 많은 돌을 옮기고 석재를 다듬어 대저택을 세운 자는 누구인가? 기와집에 산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