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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향단'. 조선시대 성종이 영남감사로 재직 중인 이언적 선생에게 "모친의 병간호 잘하라"고 지어 준 집이며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표지판에 기록
마을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향단'. 조선시대 성종이 영남감사로 재직 중인 이언적 선생에게 "모친의 병간호 잘하라"고 지어 준 집이며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표지판에 기록 ⓒ 추연만
양동마을은 조선 중기 때부터 번성한 마을로 안동의 화회마을과 더불어 영남지역 양반 문화를 직접 볼 수 있는 고택들이 운집해 있어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신라 문화재가 워낙 각광을 받은 탓일까? 경주시 외곽지에 있는 양동마을의 조선 문화재는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적어 보인다.

앞으로, 양동마을 가치가 널리 알려져 빼어난 문화유산으로 빛날 수 있도록 후손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기대해 본다. 경상북도는 1월에 "전통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111억 원을 투입해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벌여 체험·관광마을로 육성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향단' 사랑채. 경사지에 돌로 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기술이 놀랍다.
'향단' 사랑채. 경사지에 돌로 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기술이 놀랍다. ⓒ 추연만

'향단' 사랑채(좌)와 안채(우)가 한 몸체로 보일 만큼,건축한 장인 기술이 놀라울 따름. 양반집 격식 탈피하고 자연지형을 활용한 실용성이 돋보임
'향단' 사랑채(좌)와 안채(우)가 한 몸체로 보일 만큼,건축한 장인 기술이 놀라울 따름. 양반집 격식 탈피하고 자연지형을 활용한 실용성이 돋보임 ⓒ 추연만
5백년 전통을 이은 양동마을은 마을 주산인 설창산에서 뻗어내려 온 네 줄기 산등성이와 각 골짜기에 자연과 잘 조화시킨 주택 건축으로 인해 마을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1992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마을을 방문 할 정도로 조선시대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마을로 대외적으로 정평이 난 곳이기도 하다.

'검은 돌'은 어디서 구했을까?  자연석(막돌) 위에  둥근 나무 기둥을 세웠다. 많은 자연석을 옮겨 온 듯.
'검은 돌'은 어디서 구했을까? 자연석(막돌) 위에 둥근 나무 기둥을 세웠다. 많은 자연석을 옮겨 온 듯. ⓒ 추연만

'향단' 안채로 올라가는 계단이 높다. 축대 뿐 아니라, 계단도 돌.
'향단' 안채로 올라가는 계단이 높다. 축대 뿐 아니라, 계단도 돌. ⓒ 추연만
양동마을은 조선 중종 때 영남감사를 역임한 유학자 이언적과 1467년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운 배민공 후손들이 공동으로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더불어 유학자 이언적 등이 후학을 양성하여 이후, 이황 조식 등으로 명맥을 이은 영남 사림파의 산실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양동마을은 양반집과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150여 호 주택들이 산등성이 위·아래로 배치돼 조선시대 전통가옥 구조와 계급사회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가정' 입구문.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 선생이 살던 집. 언덕에 위치해 형산강과 경주를 품은 경관이 일품. 계단과 축대는 역시 돌이다.
'관가정' 입구문.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 선생이 살던 집. 언덕에 위치해 형산강과 경주를 품은 경관이 일품. 계단과 축대는 역시 돌이다. ⓒ 추연만

'관가정' 안체 초석.  사랑채와 안체가 'ㅁ'자형으로 배치. 통풍과 조명을 고려한 건축 기술.
'관가정' 안체 초석. 사랑채와 안체가 'ㅁ'자형으로 배치. 통풍과 조명을 고려한 건축 기술. ⓒ 추연만
화회마을이 낙동강 상류가 휘감은 평지에 주택을 세운 데 비해, 양동마을은 산등성이에 집을 지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양반집 양식인 동남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일반적 격식을 탈피한 가옥의 실내구조도 특이하며 산 능선과 골짜기에 마을을 조성하고 산등성이에는 주로 양반집을 배치하고 그 아래쪽은 민가를 지은 마을모습이다.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양동마을 산등성이는 탁 트인 동남향으로 경주 쪽을 훤히 볼 수 있고 설창산에서 서쪽으로 안강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안락천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형세이다. 즉,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을 전체가 명당자리란 설명이다.

'관가정'마루 받침돌. 비탈진 지형을 보완, 수평을 맞추려 돌 3개를 마루에 받힌 모습.
'관가정'마루 받침돌. 비탈진 지형을 보완, 수평을 맞추려 돌 3개를 마루에 받힌 모습. ⓒ 추연만

"관가정' 뒤뜰에 있는 기이한 돌. 저 돌이 어디서 왔나? 화산암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관가정' 뒤뜰에 있는 기이한 돌. 저 돌이 어디서 왔나? 화산암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 추연만
그러므로, 대부분 양반가옥이 배산임수의 남향집인데 비해 이곳은 설창산(雪倉山)을 주봉으로 하여 말 물(沕)자처럼 뻗어 내린 분통골, 안골, 장태골 등 네 갈래로 뻗은 구릉과 골 따라 자리를 잡아 집을 지었던 것이다.

경사지면 경사진 대로 자연스럽게 그 지형을 이용해 집을 지으니 평지에 지은 대저택에서 보이는 위압감은 줄어든다. 오히려, 양동마을 주택은 정겨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사지의 건축 작업은 평지보다 더 많은 재원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축대를 쌓는데 많은 석재가 들 것이며, 자재운반이나 숙련기술 등 남다른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관가정' 하인들이 거처했던 집이라 한다.
'관가정' 하인들이 거처했던 집이라 한다. ⓒ 추연만
안강, 기계지역 넓은 농토와 풍부한 영일만 해산물은 양동마을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당시, 양동마을의 영향력은 인근 지역 뿐만 아니라 북쪽 흥해지역으로까지 미치었다고 한다.

양동민속마을 건축에 쓰인 돌의 양과 종류로 볼 때, 양동마을 양반들은 동해안 세도가 였음이 짐작된다. 그러면, 저렇게 많은 돌을 옮기고 석재를 다듬어 대저택을 세운 자는 누구인가? 기와집에 산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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