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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위해 복원된 세계 최초의 조선 온실.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 채광창으로 썼다.
실험을 위해 복원된 세계 최초의 조선 온실.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 채광창으로 썼다. ⓒ 시설원예시험장
한국의 원예학자 전희 박사가 200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26회 국제원예학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대회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 학계에서 최초의 인공난방 온실로 인정하던 독일의 온실보다 170년이나 빠르고, 자연보온 온실의 개발국인 영국보다는 무려 240년이나 빠른 1450년경에 조선에서 온실을 만들었다는 발표였다.

조선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적힌 그대로 온실을 짓고 책에 쓰인 방법대로 난방을 하고 실험한 결과, 550년 전에도 한겨울에 채소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보고는 학계 상식으론 놀라운 일이었다.

온실의 주요 기능인 채광창의 재료로 들기름을 먹인 한지를 쓴 것은 판유리가 없던 시절로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또 그건 한지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지에 기름을 먹이면 종이는 얇아지고 마치 얇은 비닐처럼 낭창거리면서 투명도가 높아져 채광성이 우수해진다. 또 한지의 자연 통기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우린 한지를 창호지와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지를 창호지에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 생생한 예가 바로 세계 최초의 온실을 지으며 채광창에 한지를 응용한 사실이다.

한지의 새로운 수요 창출을 위한 노력들

떡살로 제작한 입체문양 한지. 한지 공예나 인테리어 소재로 응용되는 이러한 창작 한지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특허권을 신청 중. 충북 괴산 S한지 작품.
떡살로 제작한 입체문양 한지. 한지 공예나 인테리어 소재로 응용되는 이러한 창작 한지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특허권을 신청 중. 충북 괴산 S한지 작품. ⓒ 곽교신
우수한 종이로서의 한지를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는 없다. 전래 한지의 제조 기법과 우수한 지질의 전통은 재료 구입 단계부터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원료인 닥나무(국산)의 고갈, 한지 수요의 현실적 한계, 제조업체의 영세성 등 한지를 둘러싼 여건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최근 한지의 우수성에 주목한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저질 수입한지가 전통 한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며 시장 가격도 교란시키고 있어 만만치 않다.

질기고도 부드러운 한지를 채광성이 높아지도록 변형을 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온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형 한지를 온실에 응용한 선조들의 이런 노력은 다행스럽게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연히 발생한 작업상의 실수에 착안, 1년여 시행 착오 끝에 2002년에 개발된 '물방울 문양지'.  지난 1월 20일에 특허 인증 확정. 벌써 유사품이 나돌고 있으나 아직 본격 시판에 들어가진 않았다.  괴산 S 한지 작품.
우연히 발생한 작업상의 실수에 착안, 1년여 시행 착오 끝에 2002년에 개발된 '물방울 문양지'. 지난 1월 20일에 특허 인증 확정. 벌써 유사품이 나돌고 있으나 아직 본격 시판에 들어가진 않았다. 괴산 S 한지 작품. ⓒ 곽교신
능화판(고서 겉표지 인쇄용 목판)을 이용한 입체 문양지. 한지 공예재료로 쓴다.
능화판(고서 겉표지 인쇄용 목판)을 이용한 입체 문양지. 한지 공예재료로 쓴다. ⓒ 곽교신
와당문 입체 문양지(좌). 흡음 한지. 미적 기능이 뛰어난 방음재(우).
와당문 입체 문양지(좌). 흡음 한지. 미적 기능이 뛰어난 방음재(우). ⓒ 곽교신
어려운 여건인데도 한지장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한지의 발전과 새로운 용도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 종이들은 한지 벽지, 특수 화선지 등의 기초적인 변신 외에도 각기 입체문양지, 물방울한지, 투명문양지 등의 고유 이름을 달고 전통의 바탕 위에서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다.

한지 천년의 미래를 위해

현대 창작 한지는 단순히 종이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하나 장인의 혼이 들어간 그 작품들은 2차 가공없이 그냥 액자처럼 벽에 걸어놓아도 좋을만큼 품격있는 예술품들이다.

한옥 창살문을 그대로 응용한 특수 문양지. 발을 엮는 실부분에 펄프가 덜 얹히는 원리를 이용하여 개발.
한옥 창살문을 그대로 응용한 특수 문양지. 발을 엮는 실부분에 펄프가 덜 얹히는 원리를 이용하여 개발. ⓒ 곽교신
"장인의 웃음"이란 이름의 문양지. 종이를 뜬 후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아예 종이를 들 때 문양이 생긴다. 이 부분 특허권을 가진 가평 J 한지 작품.
"장인의 웃음"이란 이름의 문양지. 종이를 뜬 후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아예 종이를 들 때 문양이 생긴다. 이 부분 특허권을 가진 가평 J 한지 작품. ⓒ 곽교신
기능성 한지로 만든 옷. 오른쪽은 물방울지. 왼쪽은 반건조 상태에서 때 구긴 후 완전 건조시킨 주름지. 파티복으로  실제 사용했던 옷. 의상 디자인 윤계섭.
기능성 한지로 만든 옷. 오른쪽은 물방울지. 왼쪽은 반건조 상태에서 때 구긴 후 완전 건조시킨 주름지. 파티복으로 실제 사용했던 옷. 의상 디자인 윤계섭. ⓒ 곽교신
한지를 취재하면서 내내 고민한 것은 '전통 한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제조법과 어떤 종이를 전통으로 불러야 하는가다. 분야만 다를 뿐 다른 무형문화재를 취재하면서도 늘 따라다니던 어려운 화두였다. 과연 전통이란 무엇인가.

제조자, 소비자, 우리 전통 문화유산을 그리워하는 국민들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옛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은 답습이지 전통의 유지가 아니며, 옛 것의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는 전통의 사이비 창작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또 방치되다시피했던 지금까지의 한지 관련 정책도 현실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진통은 모든 새로운 탄생의 통과의례이다. 최고(最古)의 종이를 가진 나라에서 최고(最高)의 종이가 나올 수 있길 기대한다. 신라의 천년이 담긴 한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듯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담은 한지는 또 천년 뒤 후손에게 우리의 모습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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