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태준의 <맨발>
문태준의 <맨발> ⓒ 창비
라캉(J. Lacan)이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결핍의 체험이자, 부재하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그리움의 욕망을 채워나가는 긴 여정에 지나지 않다.

문태준의 시집 <맨발>에는 이러한 그리움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그 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보며 사라져간 것들의 빈자리를 결코 무겁지 않은 시어들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 언어들에 의해 그 빈자리의 추억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이라는 시 한 편에는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한 이유와 그가 시를 써 내려가는 방식이 시로 설명되어 있다. 시인은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라고 노래한다.

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한 편의 시를 쓰게 하는 이유이며 '우레'와 '침묵' 사이에서 그는 한 획 필체를 긋고 있다. 시인이 선택한 시어는 풍경 앞에 놓여있는 겸허한 언어들이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풍경들은 낯설지 않고 우리가 흔히 보고 살아온 그 평범한 풍경들 속에서 이지러지는, 다시 말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화 화폭을 펼쳐놓은 듯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모든 풍경들이 거꾸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햇차를 끓이다가'라는 시 속에서 그는 한 스님이 보내줬다는 햇차를 끓이다가 자신에게 묻는다.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라고.

멀리 해남 대흥사 한 스님이 등기로 부쳐온 햇차 한 봉지
물을 달여 햇차를 끓이다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이 차나무의 햇잎들로 막 피어나는 것이었다
소곤거리면서 젖고 푸른 눈썹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햇차를 끓이다가' 전문 (p.16)


누군가 찻잎을 말려 만들었을, 그래서 지난 여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을 차나무의 형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은 햇차 한 봉지를 보며 추억을 재현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거꾸로 옮겨가는 회상은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소멸의 공간을 마주하는 일이면서도 그 자신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시인은 잊혀져가는 일들에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안 잊혀지는 사랑들 / 어느 강마을에도 닿지 않을 소식들'이라는 시구처럼 시인에게 과거는 잊혀지지 않지만 다가갈 수도 없는 시간이다. 그런 이유들을 알아채고 있던 까닭일까. 시인은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이 매우 그리우면서도 과거의 시간을 인위적 힘으로 깨우려들지 않는다.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세상 한곳 한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로 시는 시작된다. 이 시에는 '까마귀', '노란 감꽃 핀 감잎', '암내 난 들고양이'가 울고 말한다. 이렇게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할 때 시인은 그저 '어둠의 귀를 터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한편 문태준의 시집 <맨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시에 담긴 풍경들이 우리의 시골 풍경, 특히 시인이 자라나며 보았을 70년대 풍경을 담고 있으면서도 결코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에 녹아있는 영화적인 기법 때문일 것이다.

어두워지는 저녁에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 있다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 '뜨락 위 한 켤레 신발' 전문 (p.32)


마치 시인의 눈으로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보고 있는듯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누이가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말없이 걷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우리는 누이가 걸어가는 그 길목을 그저 바라만보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이 한 편의 시 뿐만 아니라 시집 <맨발>에서 시인이 길에 서서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다. 마치 영화의 종결부분에서 화면이 끝남을 알려주는 페이드아웃(fade out)기법과 같이 우리가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는 영상들은 점점 흐려져간다.

시인은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그리운가보다. 그 그리움은 애절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인은 시집 맨 뒤편에 실은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말한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 나 아닌 것, 그러면서 동시에 나인 것들을 잘 섬기며 살아야겠다."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는 과정임과 동시에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잃는 과정일 것이다. 짧지 않은 생이었지만 그 속에서 참 많은 것들을 잃고 또 그 모든 것들을 쉽게 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지금 내 곁에 없는 모든 것들이 그립다.

맨발

문태준 지음, 창비(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