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 목숨은 붙어 있으나 전쟁으로 인간성이 파멸된 자, 그 모두를 위하여 국화꽃을 바친다.
전쟁의 포성이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2004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모든 전쟁은 ‘정당성’을 강조한다. 부당한 범죄적 전쟁일수록 더 그렇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쟁은 모든 면에서 이미 파산선고를 당한 지 오래다. 그래서 공범자들도 하나 둘 발을 빼고 말았다.
그러나 공범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외치는 자가 있었다. 한 하늘 아래 있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공범자가 되고 말았다.
2004년,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파멸하는가를 똑똑히 보고 말았다. 포로든 인질이든 살리고 보는 게 인륜지사다. ‘살고 싶다’는 절규를 외면한 채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죽이라’고 말한 자,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충신인가? ‘국익’이라는 말 아래 참수장면을 보아야 하는 건 약소국이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을 ‘오락’에서 떼어내면 아마 극심한 심리적 공황에 빠질 것이다. 아이들이 즐기는 건 ‘전쟁놀이’다. 상대방을 죽이는 건 이미 하나의 재미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전쟁을 일찌감치 교육한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선 친구를 짓밟고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전쟁은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평화로운 전쟁이란 어법은 성립할 수 없다. 전쟁은 분명 인류역사를 발전시켜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쟁은 침략과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세상은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쟁을 수행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이 언제부턴가 존재해왔다. 그걸 우리는 ‘제국주의’라고 부른다. 자본과 폭력으로 무장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전쟁’의 포로가 되고 있다.
전쟁은 ‘선과 악’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갈라버린다. 무조건 내가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다. 부시가 그렇고 전쟁두목을 따르는 똘마니들이 그렇다. 그래서 침략전쟁에 대항한 일체의 모든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애꾸눈이 된 그들에게 이라크와 아랍인은 무조건 범죄자다.
제국의 나팔수가 된 방송과 신문은 전쟁이 일어난 까닭은 밝히지 않은 채 테러는 범죄라는 말만 뇌까린다. ‘테러는 나쁘다.’ 이 말 때문에 자칫 구경꾼들도 공범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나 같아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두 눈을 가진 자들이 하는 말이다. 끝없는 전쟁과 테러를 불러오는 전쟁은 비극이다.
전쟁은 비극의 끝없는 시작이다. 병신을 만들고 고아와 과부를 만들고 인간 생명을 찬탈해간다.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헤매던 병사들은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리는 아직도 한국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시달리고 있다. 이미 뇌사판정이 난 국가보안법을 부여안고 살려보려고 울부짖는 모습은 분명 시대착오적 정신병이다.
오늘 한 생명이 껍질을 깨고 태어난다. 탄생의 첫 울음은 죽음 속에서 시작된다. 전쟁으로 잘린 수많은 손과 새 생명의 탄생. 생성과 파괴는 전쟁이 지속되는 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을 위해 춤을 추는 건 산 자들의 의무이자 몫이다. 어쩜 나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춤이라도 추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춤추지 않으면 세상은 더 비극적일 것 같다.
전쟁 중에도 아기가 태어나고 음악이 연주되었다. 쇼팽의 ‘녹턴’을 듣고 있자면 방울방울 또르르 맑은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쟁게임을 좋아하지만 자본과 폭력의 포로가 되기에는 아직 어린 동심만이 씻김을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전쟁들을 위한 ‘씻김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