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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젯밤 의장공관에서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하고 돌아온 뒤 새벽 두 시인 지금까지 오늘과 내일(30일) 일어날 상황을 이리저리 헤아리다 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단식 23일째를 맞는 사람들이 간혹 내는 힘겨운 한숨소리,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 국가보안법폐지 단식농성단 100여명은 27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김원기 국회의장 공관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안 직권상정을 촉구하며 촛불시위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어젯밤엔 지방에서 올라온 동지들이 가족과 친구에게 전화하는 소리를 훔쳐 들으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천막 안 동지들은 올해 안으로 국보법이 폐지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30일 밤차라도 타고 가족 곁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단식농성단에 합류한 아줌마 동지들이 밤늦게 멍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면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동병상련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손이라도 잡고 위로하고 싶지만 그러다가 함께 울어버릴 것 같아 참습니다.

하긴 저도 후배에게 맡긴 여섯살박이 늦둥이가 몹시도 보고 싶습니다. 엄마젖을 만지지 않으면 잠 못 드는 아이가 밤에 보채 후배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걱정도 되구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우리 신세가 처량하다 생각했습니다. 여기모인 동지들에게 힘이 있다면 그깟 법 하나 확 폐지해 버릴텐데 싶어 힘없는 설움이 밀려옵니다.

우린 탄핵 이후 4·15총선에서 개혁하겠다는 여당에 과반수의석을 만들어주고 민노당에 10석을 만들어준 국민들인데, 두 당을 합치면 160석이 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총선 전에 의석수가 모자라 개혁 못한다던 열린우리당은 이제 와서 국민들에게 일당독재할 수 있게 3분의 2 의석을 만들어주어야 개혁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지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김원기 의장님,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들은 그 이유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집권당의 국회 운용 미숙과 진정성을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박물관에 보내야한다”는 대통령의 발언 이후 진행된 상황을 보며 우리들은 서서히 정부여당과 청와대의 국보법 폐지에 대한 진정성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2일의 시간이 있으므로 진정성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판단하려고 합니다.

국회 운용 미숙에 대해서도 지금 논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4자회담이 파기된 후 이미 길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한나라당이 길을 외통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일을 그르친 첫 번째 이유는 국회가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국회 주변에서 다들 ‘합의처리’를 말합니다. 마치 ‘합의처리’가 유일한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인 듯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합의처리’는 의사결정과정의 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만일 합의처리만이 유일한 의사결정 절차라면 왜 ‘다수결원칙’을 정했겠습니까. 합의할 수 없는 의제들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래도 의사결정은 되어야하므로 다수결원칙을 정한 것 아닙니까.

▲ 28일 저녁 김원기 국회의장이 퇴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왜 김원기 의장님은 ‘합의처리’만을 강조하십니까. 직권상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사위에서 한나라당이 의회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가로막고 있는상황에서 보안법 폐지 직권 상정은 민주적 절차를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의회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한나라당이며 김원기 의장님입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 일부의 보수언론 편향적 사고가 문제를 그르치고 있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사실보도’나 그에 기초한 ‘합리적 논평’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관계에 따라 예단하고 심지어 사실마저 종종 왜곡해 보도합니다.

보안법 폐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일보는 4·15총선이 끝나자마자 “보안법 폐지하면 광화문네거리에서 인공기를 흔들어도 처벌할 길이 없다”는 식의 막무가내식 여론을 유포하며 일찍이 보안법 폐지를 적극적으로 가로막아왔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언론은 언론의 정도를 걷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92년 이후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성공으로 권력화한 조선일보의 경우 과거 권언유착에 의해 누렸던 온갖 특혜를 그리워하며 개혁정권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 및 지도부는 음으로 양으로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근본적으로 개혁을 거부하는 일부 언론과, 개혁을 내세워 과반의석을 확보한 정당 사이의 건전한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보안법 폐지 국면에서 일부 의원과 지도부 일부가 보여주고 있는 혼란된 모습은 바로 조선일보식 프레임에 갇혀 허덕인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김원기 의장님, 지금 여의도천막에서 23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300여명에 이릅니다. 한 청년은 57일째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김원기 의장이 보안법 직권상정을 거부해 연내 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물과 소금을 모두 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장기간 단식 중에 물과 소금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김원기 의장님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원기 의장님 끝까지 한나라당 편에 서서 직권상정을 거부하시렵니까. 그래서 이들을 다 죽이시렵니까.

겨우 단식 6일째인데도 무척 배가 고픕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천막에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고 입으로만 국사를 논하며 ‘합의처리’의 올무 안에 갇혀 헤매는 국회의 행태가 우리를 서럽게 합니다.

지금까지는 마지막 이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힘없는 서러움을 감내하고 있지만 희망이 사라졌을 때 우리 가슴 속에 타오를 분노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김원기 의장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보안법 폐지해도 나라안보 걱정없습니다. 보안법 폐지하면 남북교류와 북방교류가 가속화하여 오히려 경제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천막의 배고픔을 걸고 호소합니다. 보안법 폐지안을 직권 상정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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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민언련 사무총장, 상임대표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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