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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열매의
더 크고 튼튼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낙과가 되어야 하는
슬픔을
지금 막 세상 사랑을 시작하는
어린 열매들은 모를 것입니다

땅에 홀로 떨어져
찬란히 으깨져
말라만 가는

장하다고 어깨라도 토닥여 주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함께 부둥켜안고
밤새워 울어야 하는 건지

잊지 못해 먼저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로부터
다시 너에게로 간다.

-고 유용조 시 '낙과'


겨울 밤하늘 별은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한다. 지난 봄 이후, 나는 가끔 새벽 하늘에 말없이 떠있는 별을 올려다 보며 '용조는 별이 되었을까' 궁금했다. 시인을 꿈꾸다 지난 2월 초 서른 다섯, 서둘러 천상으로 간 청년 유용조군. 그로부터 10개월, 그의 뜻을 기린 유작시집 '모래의 눈물'이 나왔다. 새벽 하늘에서 말없는 별로 빛나던 시어들이 지상의 책 속으로 들어와 다시 가슴을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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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꿈꾸다 천상으로 간 청년

고 유용조 유고시집 '모래의 눈물'
고 유용조 유고시집 '모래의 눈물' ⓒ 김명숙
어둠 속을 걷는 것과
안개 속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어둠길은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별이 함께 하지만
안개길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가끔은 바람 불어
사방을 잠시 가늠해 볼 뿐
다시 길은 안개에 가려지고

나는 언제나 짙은 안개에 휩싸여
헤매이다 이제는
스스로 안개 되어
길 위에 서성거린다

-유용조 시 '안개길'


유용조는 10년 넘게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 지난 2월 초 서른 다섯 살 젊은 나이로 안타까운 생을 마친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가 떠난 뒤 친구 한장섭(35. 충남 청양군)에 의해 500여 편의 시를 일일이 손으로 써서 8권의 가시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지난 4월 <오마이뉴스>에 기사화 됐다.

이 기사를 본 도서출판 화담에서 유작시집 '모래의 눈물'을 펴냈다. 화담의 방규환(40) 발행인은 "시집이 제일 안 팔리는 세상이라 많이 망설였지만 유용조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어 시집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방 발행인은 "그래도 이 세상에 살았다는 한점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며 "시를 읽으면서 감명을 받아 상업적이기보다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내놓으면 나중에 누군가가 또 새롭게 작품으로써 평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책을 만들었다"고 뜻을 전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삼수 끝에 1992년 한양대에 수석 입학했을 만큼, 수재였던 유씨가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고도 병세가 악화돼 결국 이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우리 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200배로 확대 복사해 시를 읽으며, 시 공부를 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생의 절절한 시를 쓸 정도로 시를 사랑했다.

아니 시는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동안 삶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시꾸러미들은 유일한 친구였던 한장섭씨에게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깨끗한 물에
말끔히 씻어
아작 한 입 베어 물면
나도 오이처럼 푸르러질까?

-유용조 시 '오이'


서른 다섯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투병 중에도 푸르름을 꿈꿨던 유용조를 보내야 했던 친구 한장섭은 시집 말미에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작년 여름여는 지루하게 비가 많이 왔다. 작년부터 몸이 극도로 안 좋아져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그저 누런 똥만 그득 놓고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러나 작년에 서울에 올라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 하면서 친구는 떠남을 준비한 것 같다. 나는 친구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우울해지고 한 번 더 얼굴을 보게 되고 그랬다. 최후의 만남은 올해 설날 다음날 점심을 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는 서울에서 혼자 세상을 떠났고 화장을 해서 서해 바다에 뿌렸고, 친구의 시만 세상에 남아 있다. 친구야, 이제는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어라."

- 아직 남겨진 친구, 장섭이가


유용조는 수로원인 아버지(유병훈. 67)와 적은 농토를 가꾸는 어머니(최재희. 64)의 병수발을 받기가 미안해서인지, 죽음을 앞두고 서울 고시원으로 옮겨 투병을 하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혼자 숨진 채 나중에 발견됐다.

고 유용조씨가 생전에 자신이 쓴 시들을 묶어 만든 가시집
고 유용조씨가 생전에 자신이 쓴 시들을 묶어 만든 가시집 ⓒ 김명숙

'아침에 일어나시며 아버지 물 한 번 주시고
저녁에 누우시며 어머니 물 한 번 주시고
아버지 나무 한짐 지고 와선 또 한 번
어머니 밥상 물리시고 또 한 번
그렇게 나는 자라왔다
잘 자란 닷새
장에 나가 그만 4천원…
빛 잃은 서른한 살 아들에게
돈 없으면 얘기하라고
큰소리치시곤 눈물 그렁그렁,

아버지 어머니
햇빛이 없어도 눈물 하나로도 기어코 일어나
제 값을 하고야 마는 당신들의
콩나물이 이제 막 어둠속에서
머리를 힘껏 내밀어 봅니다
다시 꿋꿋하게 살아 가렵니다

-유용조 시 '콩나물'


살아있을 당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시집을 보고 시를 쓰던 아들을 보고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유씨는 나중에 시가 당선되면 제주도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했었다.

이제 그 아들은 가고 시집만 남았다. 출판사로부터 시집을 받아본 유씨의 부모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시집을 보니 더 속상하고 눈물이 나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이것이 용조의 흔적이라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둔 유용조는 하루하루 삶이 지금 겨울처럼 몹시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한겨울을 끝장내고 새 봄, 새 하늘을 그리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그가 기다렸던 봄은 참으로 더디게 왔다. 추운 계절에 제일 먼저 꽃을 터뜨리는 매화처럼 우리들에게 맑은 시집 한 권으로 피었다.

하루 빨리
한 겨울을 끝장내고
새 하늘을 그려내고 싶어
가지마다 마다 안달안달
붙들고 보채며
흩날리는 잔설과 함께 흔드는 봄바람에도
좀처럼 틈이 열리지 않더니

소곤소곤 밀려오는
너의 따스한 숨결
너의 따스한 숨결
사뿐사뿐 걸어오는
너의 환한 미소
앞에서
목젖까지 차오른 거친 그리움을
그만
탁! 터뜨리며 밤은
하얗게 까무라친다

-유용조 시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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