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등포역 야경.
영등포역 야경. ⓒ 뉴스앤조이 신철민
모자를 눌러 쓰고 집을 나섰다. 목표는 영등포역. 영등포역은 그 자체가 묘한 공간이다. 롯데백화점을 마주 보고 오른편은 이른바 ‘쪽방촌’이다. 등지고 길 건너 오른편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유흥가다. 왼편은 집창촌이다.

백화점 못 미처 버스에서 내렸다. 지갑과 시계, 반지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더니 어쩐지 허전하다. 지금 시간을 알 수 없는 점이 가장 불편하다. 먼저 청과물 시장을 둘러본다. 철거 바람이 불어서인지, 성탄 전이라 손님이 뜸해서 그런 건지, 시장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시장 끝까지 가서 오른편으로 도니 집창촌이 나온다. 성매매특별법이 한창일 때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던 바로 그 장소다.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장 분위기일줄 알았는데, 의외로 영업하는 가게가 많다. “수염 오빠, 놀다 가요”를 뒤로 하고 사거리로 나온다.

이틀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곳에 도착했다. 영등포 지하철역 개찰구 근처는 노숙인의 해방구다. 노숙인이 아닌 사람을 금하는 법은 없지만 그들의 지독한 냄새와 허름한 행색을 꺼려하는 보통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영등포역에는 나름의 룰이 있다. 기차를 타는 곳에는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다. 여기에 앉는 것이 여러 모로 편하련만, 노숙인들은 이 곳을 넘보지 않는다. 그러나 해방구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도 무방하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소주를 ‘까는’ 것 역시 가능하다.

노숙인 사이에서 한동안 넋을 놓고 대형TV를 본다. 프로레슬링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은 잦은 광고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광고가 끼어 든다. 1시간을 보고 있으니 같은 화면이 반복된다. 주위로 시선을 돌린다.

노숙인이 모두 남자일 것이라는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 여성 노숙인이 다섯에 둘은 된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도 보인다. 부부도 눈에 띈다. 간간이 작은 술판이 벌어진다. 노상에서 사온 튀김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킨다. 종이컵 가득 부은 잔을 단숨에 넘긴다.

영등포역 구내에 있는 노숙인.
영등포역 구내에 있는 노숙인. ⓒ 뉴스앤조이 신철민

12월 24일 오후 6시 20분

갑자기 역내가 술렁인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 남녀가 봉투를 나눠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얼른 달려간다. ‘축 성탄’이라 적힌 봉투를 열어 보니 2천원이 들어 있다. 횡재한 기분이다.

갑작스런 행운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봉투를 못 받은 사람은 상소리를 하며 누군가를 저주한다. 혼자 다섯 장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봉투에 든 돈을 꺼내며 오늘밤은 사우나에서 자겠다고 흐뭇해한다. 작은 소동을 뒤로 하고 봉투를 나눠 준 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라진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연인들의 표정은 화사하다.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라 했던가. 짧은 치마의 여자와 한껏 멋을 낸 남자가 다정하게 내 앞을 지나간다. 손에는 케이크를 들었다. 슬슬 날씨가 추워진다. 몸을 좀 녹이기 위해 오락실로 간다.

12월 24일 오후 9시

광야교회 전경.
광야교회 전경. ⓒ 뉴스앤조이 신철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구세군에서 도시락을 나눠줬다. 슬슬 배가 고프다. 플라스틱 용기 안에 있는 생선가스가 맛있어 보인다. 혼자서 몇 개를 챙겨 놓은 아저씨에게 달라고 말을 던질까 고민하다 용기가 부족해 포기했다.

역 광장에는 노래잔치가 벌어졌다. 광야교회 성도들이 꾸린 밴드가 풍악을 울린다. 말이 좋아 밴드지 박자, 음정 모두 제멋대로다. 말이 좋아 성도지 역전의 노숙인보다 조금 행색이 나은 정도다.

보통 사람 눈에는 엉망진창 밴드의 마구잡이 음악이지만, 모두들 한없이 즐겁다는 표정이다. 어느새 노숙인이 좁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술을 거나하게 먹은 사람들이 찬송가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사진기자들이 모여든다. 펑펑 터지는 플래시에 몸이 움찔거린다. 그래도 좋다. 관광버스 춤을 추는 사람, 블루스를 추는 사람, 전통무용을 하는 사람, 모두모두 즐겁다. 이렇게 많은 노숙인이 어디에 숨어 있다 나왔나 궁금할 정도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광장을 점령한 모습에 보통 사람들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성탄 조명 아래 사진을 찍던 사람들은 혼잣말로 짜증을 낸다. 뒤에 서서 춤마당을 구경하는 나에게 꽂히듯 말 한마디가 들린다.

“XX들, 육갑 떨고들 있네.”

거룩한 기독인이 보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성탄 축하무대가 1시간이 넘게 이어진다. 가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흥에 겨워 성탄찬양을 고래고래 부른다. 누군가 귤을 나눠준다. 너무 고마워 덥석 받아든다.

12월 24일 오후 11시

광야교회.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늘 이곳을 방문한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교회 분위기는 떡과 과자로 한껏 고조됐다. 산타옷을 입은 청년들의 재롱이 이어진다. 여전히 카메라는 여기저기서 돌아간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광야교회 성도들의 간증이 이어진다. 간증을 하러 나온 사람들을 보니 아까 광장에서 가장 열심히 춤을 추던 사람들이다. 다른 교회서 온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모두 영등포에서 지내다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새 사람이 된 경우다.

거친 욕설을 섞어가며 하는 간증인데, 은혜롭기 그지없다. 화려한 수사로 포장된 죽은 설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약, 알코올중독 같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다.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는 구수한 유행가로 흥을 돋운다.

다시 역으로 가니 시간은 12시를 넘었다. 어느새 성탄일이 된 것이다. 광장에서 밥을 나눠주던 사람들이 도구를 정리하고 있다. 얼른 달려가 밥이 남았냐고 물었다. 뜨끈한 선지국에 밥을 말아 건넨다. 광장에 서서 훌훌 먹으니 추위가 한결 가신다.

식사하는 노숙인.
식사하는 노숙인. ⓒ 뉴스앤조이 신철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길 건너 집창촌에 가보기로 한다. 낮에 봤던 가게들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길을 건너니 딴 세상이 펼쳐진다. 가게가 밀집한 골목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팔을 잡는 사람이 많다. 머리가 벗겨진 40대 아저씨 두 사람은 딸 같은 아이 두 명과 흥정을 하더니 골목으로 사라진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붉은등을 켠 가게 속에 마네킹 같은 아가씨들이 서 있다. 특별법으로 된서리를 맞았다는 소식이 어제 같은데, 경찰들이 성탄이라 바쁜 모양이다.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운다.

12월 25일 새벽 1시

영등포역에 올라오니 여기 또한 딴 세상이다. 할인 물건을 팔던 매대 자리는 노숙인들이 차지했다. 두터운 침낭 지퍼를 머리 위까지 채우고 단잠에 빠진 사람도 많다. 술판도 곳곳에 벌어졌다.

통로 한가운데 대학생 20여명이 모여 성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운데 케이크 두세 덩이가 보인다. 캐럴과 성탄찬양을 부른 이들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끝으로 노래를 접는다.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성급히 자리를 비워야 했다. 우선 잠을 방해한다는 불평이 컸다. 케이크 역시 “여기서 이것을 나눠주면 노숙인들 사이에 싸움이 난다”는 말을 듣고 가져가야 했다.

이들이 물러가자 또 다른 청년들이 몰려온다. 컵라면, 피자, 바나나, 녹차, 의약품 등 다양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 매주 이곳을 찾는 교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컵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다시 술판을 벌인다. 왜 반말을 하냐며 봉사자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어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곧 조용해진다.

노숙인 사이에서 밥을 기다리는 기자.
노숙인 사이에서 밥을 기다리는 기자. ⓒ 뉴스앤조이 신철민
또 얼마 뒤, 다른 팀이 왔다. 이들은 노숙인과 크게 부딪혔다. 이들 역시 매주 봉사활동을 하는 청년들인데, 노숙인들의 불만은 왜 어려운 우리에게 먼저 오지 않고 쪽방에 먼저 갔냐는 것이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상소리가 나온다. 선물을 주러 왔다가 되레 욕을 먹은 셈이다. 청년 중 하나가 “집도 있는 사람을 왜 돕느냐”는 항의에 “사지 멀쩡한 사람을 먼저 돕는 게 순서냐”고 맞선다.

태풍이 잦아들자 또 다른 팀이 나타났다. 벌써 네 번째다. 이들은 앞의 팀보다 훨씬 서툴다. 목사로 보이는 사람 혼자서 선물을 나눠준다. 억지로 끌려 나온 표정이 역력한 청년들이 꿔다 놓은 보리 자루 마냥 멀뚱히 서 있다. 재빨리 과자 봉지를 나눠준 이들은 입구에서 “힘내세요”를 외치더니 사라졌다.

선물 벼락이 떨어졌는데도, 영등포역은 평화롭지 않다. 이불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사람, 시끄러워 죽겠다고 짜증내는 사람들로 어지럽다. 아닌 게 아니라 노인이나 여자 중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상당하다.

광야교회 성도들의 새벽송을 마지막으로 영등포역은 차츰 조용해진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어지러운 구내를 청소한다.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코 고는 소리가 진동한다. 나는 어디서 잘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


관련
기사
[쪽방 체험기 2] 밥 한 그릇 받는데 2시간 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