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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11시경 지난 주부터 건물 임대 문제로 전화상으로 만나기로 했던 건물주와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건물주는 용인터미널에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소를 용인에 두고 산 지 삼년이 다 돼 가지만 생활권이 서울과 광주다 보니, 용인 시내를 가볼 기회가 많지 않던 저로서는, 터미널 앞에서 만나자는 말이 참 친절하게 들렸습니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전화를 하기에 앞서 주차 공간을 확인하다 보니, 터미널 옆을 지나는 고가도로 밑에 주차 공간이 있었습니다. 쉽게 주차를 마치고 터미널 입구에 잠시 서 있는데, 안에서부터 웃으며 달려오는 낯익은 이가 있었습니다. 두 달 전에 처음 만난 인도네시아 출신 아디 누르얀토(37)였습니다.

그냥 보기에도 춥게 껴입은 그는 움츠린 어깨를 하고, 주머니에 넣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방금 주머니에서 꺼낸 손인데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찬 기운이 손바닥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백암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그는 장을 보러 나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지 이 년 반이 넘은 그를 친구들은 아바라고 부릅니다. 같이 온 산업연수생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다는 그는, 휴일마다 용인 시내에서 장을 보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어 인도네시아 사람 한 무리가 나왔습니다. 마무디, 나낭, 무사, 트리, 린다, 아구스, 그 외 워낙 말이 없어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이 네 명 더 있었습니다. 검은색 가죽잠바를 입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추워 보이기는 누구 하나 아바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겨울 옷가지가 변변치 않은 건지 날씨가 추워진다는 것을 모르는 건지, 시골 어르신들 표현을 빌리자면, 다들 아직 젊은 사람들 티를 내는 듯 얇게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가오자마자 인도네시아 풍습대로 먼저 악수들을 청했는데, 손들이 다 얼음장 같았습니다.

그 중 마무디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무슨 계획 있어요?"

저는 재작년과 작년 크리스마스 때,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 대부분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한밤중에 그들이 일하는 공장을 돌며 성탄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어 심드렁하게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계획 있으면 같이 할 수 있기는 하나? 작년에 보니까 크리스마스 때도 다 일하던데."
"사장님이 아직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래도 토요일이니까 저녁엔 놀 수 있을 거에요."

마무디와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전화가 왔습니다. 만나기로 한 건물주였습니다. 얼핏 보니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건물주는 만나자마자, 임대할 건물로 성큼 걸음을 내딛는 통에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야 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저에게 아바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주저주저하다가 전화를 하겠다는 뜻인 듯 손을 귀에 갖다 대더니 곧 그 손을 흔들었습니다. 이어 마무디가 양손을 입고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전화하세요!"

잠시 건물을 보고 나서 돌아 오는 길에 다시 터미널에 들렀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방금 보고 온 건물에서 파티라도 하자고 전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이미 바람처럼 터미널을 벗어나고 없었습니다.

'허긴, 장 보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섰습니다.

저녁 늦게 아바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주저하며 물으려 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단속이 있나요? 내년에 자진출국과 불법체류자 사면이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

저는 그가 합법적 신분의 연수생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내년 상황을 묻는 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삼 년이 지나고도, 일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단속이나 강제추방 같은 정부 정책이 주는 중압감이 산업연수생인 아바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바는 한낱 소문에도 일말의 희망을 안고 저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내년에도 단속은 있을 거에요. 자진출국이나 사면은 아직 정확한 얘기가 아니에요."

제가 너무 간단하게 답해 버렸는지 아바는 다시 물어 왔습니다.

"마무디, 나낭, 무사도 내년이면 삼 년인데요. 사장님이 일해도 된다고 하거든요. 저도 사장님이 일하라고 하면 일해도 되지요?"

아바의 질문에 저는 일단 한 번 숨을 골랐습니다. 지난 주 두 번에 걸쳐 법무부와 노동부 관련 공무원들과 토론회를 해 단속과 불법체류자 사면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에 변화가 전혀 없음을 확인했던 터라, 그들의 기대가 허망함을 꼬집어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일해서 돈을 벌어 가고 싶어 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기에 답하기가 난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누구 있어요?"

저는 아바가 기대하는 답을 전하지 못해, 어색한 김에 말을 돌렸습니다.

"다 있어요."
"그래, 마무디가 묻고 싶은 것도 같은 거죠?"
"예."
"그럼 크리스마스 때 전화할게요. 그때 이야기해요."
"예!"

좀더 밝아진 아바의 대답이 지직거리는 핸드폰을 타고 들려왔습니다.

어쩌면 아바와 그 친구들은 묻고 싶은 말이 한가지였나 봅니다. 그들은 오는 크리스마스 때도 예년처럼 야근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터미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평화의 소식만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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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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