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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민주묘역 안내판
모란공원민주묘역 안내판 ⓒ 송영한

코미디 공화국

일하는 국회가 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지 겨우 6개월, 지금 여의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케케묵은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 들고 등장하면서 자기 당이 현대판 소도(蘇塗)라도 되는 듯 자기 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전향서가 없어도 되고 남의 당에 들어간 사람은 전향서를 내놓으라는 수준 높은(?)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식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아도 국가보안법만 존치시키면 국가안위가 걱정 없다는 듯이 법사위 회의실 점령을 진두지휘하는 김용갑 의원의 투쟁은 눈물겹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하긴 그놈의 국가보안법이 존치돼야 아직도 간첩으로 암약(?)하는 국회의원을 처벌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동료들도 역시 '불고지죄'로 굴비 엮듯이 엮을 수 있으니 언뜻 한나라당의 전략이 기발해 보이지만 조선일보의 여론조사에서마저도 볼 수 있듯이 우리 국민들은 이미 그 속내를 다 알고 있다.

눈을 돌려 여당을 봐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새해 예산안은 볼모로 잡혀 있고, 국민에게 약속했던 4대개혁법의 연내 처리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당내에서는 '안개 속에 길을 모르는' 모임이 속도조절론을 들고 나와 브레이크를 연신 밟아댄다.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이미 운전대를 떠나 뒷좌석에 익숙해진 의원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여당 의원들은 국가보안법폐지 등 4대 개혁법의 완성이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매조지하는 화룡점정의 의식인 것을 깊이 통찰하여야 할 것이다.

선열들이 그립다

아직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거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바람이 어디서 어떻게 불어왔는지 벌써 잊었거나 모르시는 의원님들은 '민주묘역'을 찾아 민족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진 열사들의 무덤 앞에서 분향하고 한잔의 술을 따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듯싶다.

늦봄 문익환 목사 묘지에서 내려다 본 모란공원민주묘역 전경
늦봄 문익환 목사 묘지에서 내려다 본 모란공원민주묘역 전경 ⓒ 송영한
국립 현충원처럼 잘 다듬어져 있지도 않고 사시사철 향연(香煙)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향로는 없을지라도 민주묘역에는 초(燭)가 스스로를 살라 빛을 내듯, 살아서 온몸을 불살라 민족의 제단에 향이 되어 스러져간 민주영령들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

불멸의 영혼들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민주묘역은 '경기 모란공원' '광주 망월동구묘역' '양산 솥발산묘역' 등이 있다. 그 중에 서울과 인접한 '모란공원 민주묘역'은 중부고속도로 구리 나들목에서 춘천 쪽으로 방향을 틀어 20분쯤 달려 마석읍내를 지나 나지막한 오르막길 오르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다.

왼쪽에 미술관을 두고 허름한 철문을 들어서면 죽어서도 산 자들 82위(位) 유택들이 번호가 매겨진 채 오른쪽에 안내판에 표시되어 있다.

묘지의 중앙통로로 들어서면 정면에 추모비가 서 있다.

모란공원 민주화열사 추모비문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 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밝혀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자의 빛이요 별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지어니. / 글:서해성


그렇다 진실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며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춘추를 읽고 선왕들의 실록을 읽으며 선열들의 경험과 지혜를 빌려 나라를 다스렸다지만, 이제 스스로 나라의 주인 된 우리는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 삼가 '구국의 불씨'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민주열사 추모비
민주열사 추모비 ⓒ 송영한
흰 고무신 계훈제 선생

추모비 바로 오른쪽에 평생을 대쪽 같이 살다 가신 계훈제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나시어 학병거부와 항일운동에 참여하시고 장준하 선생의 평생지기로 삼선개헌반대투쟁에 결연하게 나서서 우리에게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주셨다. 이어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내란음모죄'로 수배 2년여를 숨어 지내셨으며 민통련 의장으로 활동하시다 구속 되셨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으로 계시다가 1999년 영면하셨다.

평생을 학과 같이 고고한 인품으로 뭇사람을 감동시키시고 항상 화려한 조명보다는 바람을 막는 병풍이 되기를 자처했던 분, 그분만큼 명예와 이익과 권력에서 자유로운 자유인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한쪽 폐를 잘라내어 항시 한쪽으로 기우신 모습과 트레이드마크인 흰 고무신을 신고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시고 이곳에 잠들고 계신 것이다.

계훈제 선생 묘
계훈제 선생 묘 ⓒ 송영한
변호사의 부끄러움으로... 조영래 변호사

계훈제 선생 묘소에서 바로 위에는 이 땅의 법조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조영래 변호사의 묘소가 있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5년에 서울대에 입학한 조변호사는 1971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뒤 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된다. 83년 변호사 개업한 조 변호사는 한자로 된 노동법을 읽지 못해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 열사의 때늦은 친구가 되어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다.

이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변론하여 전두환 독재정권에 마지막 치명타를 먹인 조 변호사는 1990년 폐암으로 43세 연부역강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고시공부 중에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일생 빚진 자 되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수석합격생의 탈을 벗고 변호사의 부끄러움을 가슴에 묻고 산 조 변호사의 평생 화두는 '왜 세상은 책에서 배운 대로 되지 않을까?'였다.

조영래 변호사 묘
조영래 변호사 묘 ⓒ 송영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조영래 변호사 오른쪽 위에는 22세 꽃 같은 나이에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마지막 처절한 외침을 남기고 불꽃으로 산화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묘소가 있다.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열사는 단신으로 상경한 어머니를 찾아 막내 동생을 업고 뒤따라 상경 평화시장 견습공으로 취직 '한미사' 재단보조사로 일하였다. 이어서 열사는 평화시장 안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조직하고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한다.

삼동회는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요구사항들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투쟁하다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열사는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이 나라 노동자들을 대변하여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부르짖으며 온몸을 살라 산화했다.

열사의 분신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중대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개발독재의 기계가 아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진정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며 열사는 이 나라 노동계에 영원한 등신불(等身佛)로 남아 생전에는 얼굴도 모르던 대학생 친구 조영래와 이웃하여 잠들어 있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 묘
전태일 열사 묘 ⓒ 송영한
독재의 칼날에 쓰러진 최종길 교수

전태일 열사 왼쪽에 최근 중앙정보부에의해서 타살된 것으로 결론 난 법학자 최종길 교수의 묘소가 있다. 최 교수는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독일의 퀼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최 교수는 1973년 10월 16일 악명 높던 중앙정보부에 출두 조사를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에 당국은 최 교수가 조사를 받던 중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으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0년 5월27일 최 교수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유신의 칼날이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불법 부당한 권력에 맞서 강요된 진술을 하지 않음으로써 권위주의 권력행사에 저항하다가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만약 최 교수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한들 국보법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었을 것이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 역시 줄줄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되었을 것이다. <조선일보>에 유신찬양 칼럼 한 편이면 일신의 영달이 보장되던 위치에 있었던 그의 올곧은 지조와 저항을 동지의 명단을 팔아 목숨을 연명하여 집권한 당시의 독재자나, 전향서 한 장 없이 한나라당에 둥지를 튼 지금의 변절자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최종길 교수 묘
최종길 교수 묘 ⓒ 송영한
늦봄 문익환 목사

최종길 교수의 묘소 바로 위에는 늦봄 문익환 목사가 한 평 남짓한 곳에 잠들고 계시다.

문 목사의 생애야 이미 온 민족이 알고 있는 터, 더 이상의 필설이 필요할까?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히브리어에 능통한 신학자로, 말년에는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쳐 겨레를 사랑한 선구자로 살다간 목사님은 1994년 1월18일 그렇게도 그리던 남북 정상회담과 민족의 화해를 보지 못하고 돌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영래가 평생을 전태일에 대해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면 문 목사님은 평생을 친구인 윤동주 시인에 대해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 한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 되어 친구가 못 다한 시를 육필로 남기고 갔는지 모른다.

문 목사님도 겨레 사랑을 외쳤고, 수만 명씩 무리지어 미국의 부강과 부시의 건강을 위해 기도회를 여는 '한기총' 목사들도 겨레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절대자와 역사의 심판에 앞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삭정이 같은 육신까지 민족을 위해 번제로 드린 목사와 검은색 최신 세단에 몸을 싣고 호의호식하는 것도 모자라 대물림까지 하려는 목사들을 비교해 보며 민중은 이미 누가 참 목자이고 누가 삯꾼목자인지 역사의 심판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나이만 먹으면 원로랍시고 독재에 협조했던 하수인이나, 지조를 지키지 못한 성직자들이나, 이사람 저사람 염치도 모르고 나서서 주절거리는 마당에 이 시대의 진정한 원로로 늦봄 목사님이 살아계셔 민족을 인도해 주셨더라면…. 새삼 늦봄 목사님이 그리운 이유다.

늦봄 문익환 목사 묘
늦봄 문익환 목사 묘 ⓒ 송영한
민주화의 밀알 박종철 열사

문익환 목사 묘소 한 계단 위 오른쪽에 박종철 열사의 묘소가 있다. 1965년 부산에서 출생한 열사는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 중 1986년 '청계피복노조합법성 쟁취대회'에 연루 구속되어 징역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한 뒤, 1987년1월13일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1월14일 고문에 의해 산화하였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열사의 죽음으로 무시무시한 겨울 공화국은 무너져 내렸으며 이 땅에 민주의 봄은 끝내 오고 말았다.

그러나 '죽은 놈만 불쌍하다'고 했던가? 그가 몸 바쳐 끝까지 보호했던 그의 선배는 '이승의 악연은 이승에서 풀어라'는 법구를 실천하려는 수도승이 되었는지, 열사의 몫까지 두 배를 살기 위해 따뜻한 둥지가 필요했는지. 고문의 조종간을 쥐고 있던 인사들이 활개 치는 당에 입당하여 영달을 꾀하려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386세대인 열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디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여의도? 대학 강단? 아니면 요즘 한창 뜨는(?) 뉴 라이트 운동에 맞선 뉴 레프트 운동의 주도자로? 어느 곳에 있든지 그의 열정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열사의 산소 앞에 누군가가 두고 간 소주병에 반병 남짓한 소주가 남아 있었다. 그 술은 아직도 열사를 기리는 사람이 두고 간 것일 수도, 변절자들의 양심이 몰래 두고 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김빠져 밋밋한 소주지만 나머지를 산소에 부으며 소주 한 병 챙겨오지 못한 오지랖을 탓해본다.

박종철 열사 묘
박종철 열사 묘 ⓒ 송영한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못다 피고 산화한 열사들의 넋이 피어난 듯 이름 모를 산소 위에 민들레 한 송이가 철모르고 피어 있다. 이제는 지사도 없고 투사도 없고 열사도 없는 이 나라에 한 홀의 씨를 날리지도 못할 거면서. 왜 하필 이 추운 겨울에 피어났느냐? 살아생전 추위에 그만큼 떨었으면 됐지.

일일이 거명하지 못한 수많은 열사들. 살아서도 매명(賣名)을 천하게, 명예를 헌신짝처럼 여기던 분들이니 그 넓은 가슴으로 기자를 용서하리라 믿는다.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 우리는 그 불어오는 곳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누구의 날갯짓으로 시작되었는지를….

철 모르고 피어난 민들레는 열사들의 넋인가?
철 모르고 피어난 민들레는 열사들의 넋인가? ⓒ 송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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