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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5월 1일 비는 내리지 흐린 날씨에 바람만 거세게 불었다. 조선 전라 좌수영군 모두는 여수 앞바다에 모여 있었다. 좌수사 이순신 (李)과 방답첨사 이순신과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이 전라 좌수영 주둔한 여수 본영의 진해루에 앉아서 멀리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제 한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전의를 다졌다.

다음 날도 좌수사 이순신은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경상우수사 공문을 받고 첫 해전을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에 혼열을 다했다. 이날의 동태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살펴보자.

초 2일 맑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승선하였다. 해상에서 진을 치고 여러 장교와 더불어 의논하니 모두 기꺼이 출전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낙안 군수 신호(申浩)만 피할 뜻을 가진 듯하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피하련들 할 수 있을 일인가. 저녁에 방탑의 첩입선 세 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전라 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 출동이 지연되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3일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전쟁을 겪는 백성이 흘리는 눈물처럼. 이순신은 전 함대에 다음 날 출동명령을 하달하고 도망병 여도 수군 황옥천(黃玉千)의 목을 베어 전군에 효시함으로써 군법의 준엄함을 알렸다.

전라좌수영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여수를 떠나 자원하여 바닷길의 길잡이가 된 광양 현감 어영담을 앞세워 거제도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나기로 하였다.

전라 좌수영군은 이때까지 전비를 강화하고 적정의 수집, 부하의 사기를 높이고, 출전하는 군사들의 정신 통일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출전하는 군사들 중 한 사람도 해전의 실전을 체험한 군사가 없었다. 이순신 자신도 실제 해전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단지 일본 함선을 격파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는다는 신념만으로 출전하였다.

4일 첫닭이 훼도 치기 전인 새벽 축시(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전라 좌수영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도합 85척이 출정하였다. 날씨는 맑아 항해는 순조로웠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우척후,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서 적을 찾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도록 약속했다.

전라 좌수영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한 척의 일본 군선도 발견하지 못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앞바다에 모여 정박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고 밤을 지냈다.

5일 새벽에 전라 좌수사, 경상 우수사가 서로 합세하기로 약속한 당포 앞바다로 향하였다. 이 당포는 출전 전의 공문을 주고 받으면서 경상 우수사 원균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였다. 당포 앞바다에 도착한 이순신 함대는 원균 뿐만 아니라 경상도 관하의 수군 어느 누구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빠른 경쾌선(輕快船)을 보내 경상 우수영도 합세토록 연락을 취했다. 5월 6일 아침에 한산도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은 판옥선 1척을 타고 합류했다.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 미조항 첨사 김승룡(金勝龍), 평산포 권관 김축(金軸)이 판옥선 1척에 동승.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 지세포 만호 한백록(韓百祿),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판옥선 2척에 동승. 사량 만호 이여염(李汝恬) 협선. 소비포 권관 이영남(李英男)도 협선을 타고 와 5, 6일에 합류해 전체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을 합하면 91척으로 늘어났다.

이날 이순신과 원균을 포함한 두 도의 장수들은 작전회의를 거듭하고 거제도 송미포(松未浦)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군과 경상 우수영군을 통합한 전함 91척에 대한 총지휘를 맡았다.

7일 새벽에 조선 수군은 다시 함선을 출항하여 일본 군선이 있다는 천성(天城)과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향해 진군해 갔다. 정오경 거제도 옥포(玉浦) 앞바다를 통과할 무렵, 척후선의 우척후장(右斥候將) 김완 등이 신기전(神機箭: 멀리 떨어져 있는 부대 사이에서 불꽃이나 연기를 이용한 신호용 화살)을 쏘아 올렸다. 적의 함선이 옥포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 군선을 발견했다고 보고해 왔다. 전라 좌수영을 떠난 지 5일만에 첫 해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겁 많고 실전 경험이 없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조심스럽게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의 운명을 좌우한다. 만일 여기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는 날에는 조선군의 사기는 날벼락을 맞는 만큼 타격을 받는다. 이순신은 주름진 결의를 다진 얼굴로 여러 장수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신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勿令妄動 靜中如山)"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함대에 맞선 일본 측 함대는 소속을 명확히 알 수 없는 30여 척 규모로 옥포만에 정박 중이었다. 그들 중 큰 배는 휘황찬란한 그림과 무늬로 치장한 장막을 두르고 긴대를 세워놓았었다. 배의 가장자리에는 붉고 흰 작은 기가 바람에 나부껴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일본 수군 무리들은 포구의 육지에 올라가서 약탈질과 불을 질러 온 산에 연기로 가득했다. 그들은 옥포에 돌입하는 조선 함대를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하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에 올랐다. 일본 수군은 닻줄을 끌어올리며 소리를 지르며 그 중 6척이 해안을 따라 도망을 치려고 하였다. 조선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온 힘을 다해 배 안에 있는 모든 군사들이 서로 격려하며, 분발하여 죽기를 각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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