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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턱의 움막 같은 연구소경기도 구리시 외곽 갈매동 자연취락 마을인 협동마을 입구에서 산중턱까지 한참이나 숨찬 발걸음을 옮겨서야 '맑은 샘(雅泉)' 김차봉(67세) 선생의 공방 '아천 전통칠기연구소'가 있는 갈매동 산 68번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요즘은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60~70년대 달동네를 연상케 하는 집들 가운데 다른 집들보다 좀 큰 움막 같은 집에 붙어 있는 주소를 확인하고야 공방임을 알아차렸다. 입구를 몰라서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겨우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한 쪽문으로 몸을 굽혀 들어가니 코를 찌르는 칠 냄새와 윙윙거리는 기계소리가 기자를 반겨주었다.@IMG2@바로 문 앞에서 기계로 옻칠수저를 손질하고 계신 분이 선생임을 직감하고 인사를 건네니 "마~ 한 삼십분만 기다리소"하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하며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신다.머쓱해진 기자는 키가 큰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만 다닐 수 있을 만큼 낮은 공방과 살림집 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과 도구와 살림살이를 사진 찍고 감상하노라니 어느덧 일을 마친 선생이 먼지를 털며 안으로 들어오신다.칠기의 좋은 점을 말로 다 할 수 있나?무슨 큰 작품이나 만들고 계실 거라는 기자의 선입감으로 "수저를 만들고 계셨어요?"하고 물으니 "공예품이 별거요? 사람들이 실생활에 사용하는 것들이 공예품이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IMG3@아르바이트로 선생의 잔일을 거들어주는 아주머니가 차를 내왔는데, 기자는 앞에 놓인 칠기 찻잔과 주전자를 보고 세삼 "내가 칠 공방에 와있구나"하고 느꼈다. "찻잔이 무척 가볍네요"하고 말을 건네자 "칠기는 가볍다는 것 외에 항균(抗菌), 항암(抗癌), 방부(防腐),방충(防蟲), 방수(防水) 등 여러 장점이 있지요, 잘 깨지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해오는 온기가 도자기와 틀리잖아요? 지금 이 정도 온도면 아마 도자기는 뜨거워서 맨손으로 들지도 못할게요" 한다.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칠기 잔을 통해 전해오는 온기의 친화성은 마치 갓난쟁이 볼깃살을 만지고 있는 듯한 따스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IMG4@"또한 칠기는 자개 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넣거나 붙여서 장식하는 공법인 나전(螺鈿)말고는 자기(磁器)처럼 인위적으로 무늬를 그린다든가 하는 일이 드믑니다." "이 잔이 물푸레나무인데 자연스런 무늬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장이는 그저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살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무뚝뚝한 첫 인상과는 다르게 찻잔을 사이에 두고 선생의 칠기 예찬은 거침없이 이어진다.사실 칠기의 장점은 우리보다도 선조들이 먼저 알아서 이집트에서는 이미 BC 3000년 전에 이미 옻칠이 사용되고 중국에서도 BC 2500년부터, 우리나라도에서도 BC 1000~300 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칠기파편이 충남과 황해도 석관묘에서 발굴되었다 하니 칠의 썩지 않는 성질을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옻칠한 관에 눕는 것을 마지막 사치로 여겼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시신이 거의 썩지 않은 옻칠 관에 누워 있는 미라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칠기에 담긴 밤이 썩지 않고 발견된 일이 있다 한다."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여름에 칠기에 음식을 담아보면 금방 알아, 음식이 상하는 시간이 다른 그릇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옻이 곧 칠이야"옻이라고는 여름철에 보신용으로 먹는 옻닭밖에 모르는 기자는 내친김에 옻칠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내었다."옻이 어떻게 칠이 되죠?"이런 우문에 선생은 "옻이 칠이지 뭐"하고 싱긋 웃으신다."옻나무가 한문으로 칠목(漆木) 아닌교, 그러니 옻이 칠인 게지."보통 건축물이나 공예품에 칠했던 칠로는 옻과 황칠(黃漆)이 있다 한다. 옻은 옻나무에서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채취한다고 한다. 옻나무나 황칠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무는 스스로 치료하기 위하여 수액을 내뿜는데 시간이 지나면 옻나무 수액은 어두운 밤색으로 황칠나무 수액은 황금색으로 변한단다. 이 수액의 불순물들을 걸러내면 천연도료인 옻칠과 황칠이 되는 것이란다.함경도를 제외하고 한반도 전역에 골고루 자생하는 옻나무와는 달리 난대성 활엽수인 황칠나무는 전남과 제주 일대에서만 소량 생산되어 귀할 뿐더러 값도 옻칠에 비해 몇 배나 비싸다고 한다."이 원액을 그냥 쓰면 생칠이고 수분을 증발시켜 쓰면 투명 칠, 쇳가루를 섞어 쓰면 검정 칠, 경면주사(鏡面朱沙)를 섞으면 붉은 칠이 되는 거요. 또 그밖에 여러 안료를 섞어 다양한 색을 낼 수도 있다 아닙니까."@IMG5@정말로 선생의 살림집 거실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칠해진 소품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옻칠하면 투명칠과 흑칠(黑漆), 주칠(朱漆)밖에 모르던 기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칠은 나무만이 아니고 도자기나, 베, 금속, 가죽들에도 올릴 수 있다 하니 가히 친화성이 뛰어난 천연도료임이 분명하다.@IMG6@"옻의 용도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자개를 붙여 만드는 나전에서는 옻을 아교와 섞어 접착제로 쓰기도 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성질도 있어 12자 옻칠 장롱 하나만 있으면 집안에 가습기가 필요 없을 정도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지만 스승님만 생각하면..." 뜨악했던 분위기가 칠기 예찬으로 살아나자 기자는 선생의 칠공예 입문과 파란만장한 50년 칠장이 인생의 애환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언제 칠공예에 입문하셨습니까?"1939년 경남 거제에서 나신 선생은 중학교 2학년 때 충무 나전 공방에 입문하여 주경야독의 수련을 쌓았다 한다."그때는 모두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을 때 아니요? 내 사촌 형님이 목수셨는데 먹는 것이나 해결하라고 나전칠기로 유명한 통영의 한 공방을 소개시켜주셨는데 그때가 아마 1956년 내 나이 17살 때 일거라."@IMG7@1년 뒤 첫 스승인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칠기장 고 민종태 옹을 만나 비로소 칠공예에 눈을 뜬 선생은 1969년 두 번째 스승인 고 김태희 옹께 사사함으로 자신이 칠장이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임을 느꼈다고 했다."10년 뒤 1980년에 독립하여 '원화칠기공방'을 설립하였지만 아직도 두 스승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꾸짖는 듯해요."선생은 젊은 날을 바쳐 기술을 배우던 옛 생각과 스승에 대한 회한이 북받치는 듯 한동안 말문을 닫았다.@IMG8@"스승님에 대한 추억이 남 다르시네요?"하고 기자가 말문을 트자 "내가 스승께 죄송스러운 것이 두 가지라오. 첫째 제자는 스승의 경지를 뛰어넘어야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인데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죄스럽고 둘째는 스승님들과 같이 만든 작품 가운데 '12자 금강산장자개농' '나전 자경대' 등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나중에 스승님들을 뵐 낯이 있겠소?1991년에 일본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에 3년간 그들의 나전칠기를 수리해주러 갔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우리가 수리해주고 만들어준 작품들을 후세에 그들은 자기네 것이라고 떠들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아 당장 돌아오고 싶었지만 국제적 망신을 살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작 나는 스승의 작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어찌 회한이 없겠소?""야인이 뭐 어때서"선생은 제3회 한국 예술대전 전통공예부분 입·특선을 시작으로 1996년 서울시 전통공예품 공모전 대상 등 수많은 영예로운 상을 받았고 1999년에는 경기도 으뜸이 신지식인으로 선정 되었지만 여전히 전통 칠공예계에서는 야인으로 통한다."직설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나의 외골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근본적인 정책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상을 타든, 방송에 뜨든, 일시적인 반응만 있을 뿐 우리 문화를 전승하려는 근본적인 정책이 부족합니다.내가 일본에 가서 제일 부럽게 느낀 것은 장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나라에서 마련해준 공방에서 작품만 만들고 지자체나 나라에서 그것들을 전시하고 홍보하여 올린 수입으로 모두가 함께 공유하며 사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니 십 수대를 이어온 명인 가계(家系)들이 있는 것이지."@IMG9@이곳 구리시도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년에 한 번 공모전에 접수해야 출품 연구비로 100만 원 정도 보조해줄 뿐인데 실제 필요한 것은 이웃한 남양주나 성남처럼 최소한 '공예인들이 모여 연구하고 전시할 수 있는 사무실과 전시관을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일침을 놓는다."서울에는 일선 구청에서도 문화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는 곳이 많아요. 문화사업은 한 번 투자하면 확대 재생산되고 이미지 홍보효과도 좋으니까……. 결국은 행정가들의 마인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로만 문화도시라고 떠들면 누가 들은 척이나 하나요?공모전이나 문화재지정 심사하는 방법도 이제까지 출품작과 첨부된 서류로만 심사하던 관행을 벗어나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공정들을 면밀하게 직접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그래야 청이나 주최 측이 심사의 공정성 시비에서 자유롭고 명실 공히 문화재나 제전(祭典)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 아닌가?"선생의 말 속에서 6년 전 이곳 구리시에서도 제일 한적한 산꼭대기에 정착한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지 뭐""내 딴에는 한적한 곳에 처박혀 일이나 몰두해볼까 했는데 어디 속세를 떠나기가 쉽나? 부딪히는 것이 사람들이요, 걸리는 것이 장이들인데. 그저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거니 하고 이제는 포기하고 사는 상태요, 허허허."@IMG10@선생은 후학에도 뜻이 있어 모 대학원 전통공예과 지도자 과정도 수료하였지만 "요즘에 어떤 젊은 사람이 이런 것을 배우려 하겠소? 가뭄에 콩나듯 한사람씩 오기는 하는데 몸이 가렵다고 일주일을 못 버티니, 요즈음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서 이제는 슬슬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는데"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다행히 선생 곁에는 40년을 한결같이 동료로 또는 내조자로 일해온 부인 이소지(64세) 여사와 요즘은 선생의 공방에 부쩍 관심을 보이는 큰아들 형준(36세)이 있어 외롭지는 않단다."발명특허도 받았다구""내가 좀 엉뚱한 데가 있어 옻을 연구하다 보니까 옻의 특성을 이용한 생활제품들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발명특허를 받아놨어요. 장판이나 벽지에 이용하면 습도를 조절하고 전자파를 막아주며 섬유에 응용하면 원적외선을 내뿜는 원사를 만들 수 있는 도료, 그리고 정수기 필터에 사용하면 살균과 제독(除毒)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 하지만 막상 상품화하려니까 수십억의 자본이 필요해서 장롱 속에서 마냥 썩고 있다 아닙니까, 허허허"하면서 발명특허증 들을 꺼내 보인다.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기자의 손을 이끌고 선생은 공방과 붙은 살림집 거실로 인도한다. 한 켠 쪽문을 여니 그곳은 선생의 부엉이 창고인 양 선생의 손때가 뭍은 온갖 소품들이 먼지를 쓰고 널려 있었다."내가 칠장이니 줄 것이 이것 밖에 더 있나"하며 호두나무와 물푸레나무로 만든 잔을 손에 꼭 쥐어 주신다. 염치없는 마음에 "아니 작품들을 진열장이라도 만들어 넣어 놓으시죠"하고 말했더니 대뜸 "개발에 편자라고 쓰러져가는 집에 진열장을 놓을 곳도 없거니와, 아니 흙이 묻으면 금이 아니고 꼭 부잣집 마님 노리개에 붙어야만 금이요?"하고 통박을 준다."나는 역사를 배울 때 석굴암은 아무개가 만들고, 에밀레종은 아무개가 만들고 불국사는 아무개가 세웠다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참 웃기는 얘기다고 생각했소.그들은 그냥 책임자였을 뿐이며 석굴암은 이름 없는 석공이, 에밀레종은 이름 없는 쇳물쟁이가 불국사도 이름 없는 목수들이. 이 땅의 모든 문화유산들은 이렇게 이름 없는 장이들의 피와 땀으로 된 것이라 생각하오." "하물며 보잘 것 없는 내가 이 땅에 이름 없는 칠장이로 남은들 대수요?"선생의 마지막 일갈은 부와 명예만 좇는 사람들과 우리 것을 우리 것 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50년 외곬 칠장이의 죽비요 할(喝)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구리넷(www.gurinet.org)에도 송고하였습니다.
송영한기자는 구리넷 시민기자입니다.


#옻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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