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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발견된 늑대뼈로 된 셈막대
체코에서 발견된 늑대뼈로 된 셈막대
그 이외에도 흥미를 끄는 유물은 우간다와 콩고 사이의 에드워즈 호숫가에서 1962년 하인젤린(Jean de Heinzelin)에 의해 발견된 '이샹고의 뼈'가 그것이다. 학자들 간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략 기원전 2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뼈는 단순한 셈 막대 이상의 '무엇'이었던 것 같다. 현미경으로 관찰해 본 결과, 달의 주기 변화와 관련된 듯한 표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보름달이 뜨는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와 생활상의 실용적인 이유가 함께 내포돼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에 대한 기록은 남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발굴된 '비비의 종아리뼈'이다. 이 뼈에는 기원전 3만 5천년경에 누군가 그어놓은 선명한 금이 29개 남아 있다. 이 금(선)은 오늘날까지도 나미비아에서 시간 흐름을 기록하는데 사용하는 '날짜 막대(calendar stick)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이샹고(Ishango) 의 뼈
이샹고(Ishango) 의 뼈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도 '율리시즈에 의해 장님이 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는 자신의 양을 관리하기 위하여 동굴 입구에서 양들이 나갈 때마다 작은 돌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조약돌을 하나씩 내려놓았다'는 이야기에서 셈법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폴리페모스는 이렇게 하여 장님이 되어서도 양들을 잘 관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방법은 추상적 수사(數司)의 발견 이전에 '일대일 대응'이라는 셈의 기본을 이용한 좋은 예이다.

이런 셈법들이 기록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2만~3만 5천년 전이라면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이 무렵은 수렵 및 채취 경제를 중심으로 한 원시 공동체 사회이다. 당시 셈을 한다는 것은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절실한 것이었다. 채취한 동물과 음식물을 배분한다거나 가축이나 짐승 떼의 크기를 알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쓰인 도구들이 위에서 본 뼈에 새긴 셈 막대나 조약돌 등이다. 이것이 원시 공동 사회에서 셈하기를 시작한 동기였을 것으로 추정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셈법의 일대일 대응에 의한 방법이 양의 마리수를 관리하거나 기타의 셈을 하는 데는 적절하였지만, 수의 개념으로 정착 하는 데는 더욱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다.

여러 사물들 속에 수라는 추상적 공통성을 찾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즉, '말 2 마리', '사과 두개', '쌀 두 가마니', '두개의 별', '두 번의 전쟁'과 같이 여러 물건 또는 사건들 사이에 공통되는 수학적 속성이 '2'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유하는 동물'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추상화의 능력인 것이다. 이를 두고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치열하게 살다간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평화 운동가인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인류가 닭 두 마리와 이틀의 2를 같은 것으로 아는데 수 천년이 걸렸다"는 말로 표현했다.

일반인들은 1, 2, 3, 4… 따의의 수(양의 정수 또는 자연수라 이름한다)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음수나 무리수, 허수는 상상의 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학적 체계 안에서만 존재하도록 약속된 고도의 추상적 기호일 뿐이다. 이런 일정한 체계 속의 기호들이 신비롭게도 우리의 삶과 기술과 과학의 영역에 널리 이용되고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0'이라는 숫자는, 1, 2, 3, 4, 5… 와 같이 양의 정수(다른 말로 자연수)로 볼 때 위의 사물과 일대일 대응이라는 측면으로는 단순히 없다(無)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수의 영역을 확장하여 -1, -2, -3, -4, -5… 와 같은 음의 정수(음수)에서의 '0'은 양수와 음수의 경계점이 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섭씨온도(Celsius scale) '0'도는 화씨온도(Fahrenheit scale)를 32도라고 할 때, '0'은 온도의 상대적 비교를 위해 설정된 값이다.

여기에서 '0'이라는 값은 고정된 방식으로 해석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수라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 기호일 뿐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양의 정수의 수학적 연산 체계 내에서 곱한다는 것은 그 곱의 수만큼 더한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컴퓨터에서 곱셈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6*5=(6+6+6+6+6)=30 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음의 정수와 음의 정수와의 곱은 양의 정수가 된다.

예컨대 (-)6*(-)5=(+)30가 된다. 이런 경우 양의 수를 '소유하고 있는 재산' 음의 정수를 '빚 혹은 빌린 것'으로 대응하면 빚에 빚을 곱하면 재산이 된다는 허무한 역설이 되는 것이다.

위의 식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빚과 빚을 곱하면 재산이 된다는 현실적 논리가 성립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돈 떼어먹는 방법과 빌린 돈을 갚지 마라'를 쓴 저자가 자신의 책 내용대로 남의 돈을 떼어먹다 검찰에 붙잡혔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 돈을 많이 빌리면 그것이 자신의 재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음수와 음수의 곱이 양수라는 규칙은 현실의 문제와는 무관한 수학적 약속 또는 규칙으로 만 존재하는 것이다.

수에 대한 인류의 연구는 '수는 어떤 체계내의 규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수의 몇 가지 특성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수는 어떤 사물 혹은 자연의 특별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수라는 기호는 현실의 여러 셈의 영역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 이 수라는 기호는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등의 연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로 수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를 통한 관념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수는 그 연산이라는 조작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과 경험세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기도 과학과 문명을 창조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상부구조인 문화 제도 등은 하부구조로서의 사회적 생산성에 의해 제약된다고 한다. 나아가 그 생산성은 그 사회의 기술 발전에 의해 촉발되고 그 기술의 이면에는 수학적 응용의 영역으로서 과학발전이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선을 보내 인간의 정복사의 역사를 다시 쓰기도 하고 핵 폭탄을 먼저 개발하여 세계 지배화 전략을 공고화하기도 하고 인터넷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의 전통적 지배구조를 깨부수고 변혁시킬 역량으로서의 대안언론이 새로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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