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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우당 이회영 ⓒ 우당기념관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은 '삼대 각오'를 하였던 바, "굶어서 죽을 각오, 얼어서 죽을 각오, 적의 총에 맞아서 죽을 각오"였다고 한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으로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8대의 판서 중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지낸 명문 중의 명문 후예 우당 이회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당 부인 이은숙 여사의 수기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무진년(1928년) 여름, 하루는 가군(우당 이회영)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규숙, 현숙(우당의 2녀 3녀)을 천진의 부녀구제원으로 보내어 성명을 홍숙경과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 만하면 받아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3남)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니, 혹 다소간 되거든 현아에게로 부치라고 하시고는 지금 떠나면서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망창(앞이 아득함)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우당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쌀이 없어 밥을 못 짓고 밤이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동북아 지도를 펴놓고 망명을 상의하는 우당 6형제
동북아 지도를 펴놓고 망명을 상의하는 우당 6형제 ⓒ 우당 기념관
이규창은 북경 시절의 궁핍상을 '1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라며 북경의 제일 하층민들이 먹는 짜도미(雜豆米)로 쑨 죽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도 이회영의 생활형편이 드러나 있다.

우당 이회영은 성재 이시영의 형이다. 가족을 데리고 북경에 사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생활 형편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지만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나는 매우 존경하였다. 하루는 내가 우당 집에 찾아가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 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털어 땔감과 식량을 사오고 전당포에 잡힌 옷도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그 일로 우의가 더욱 친밀해졌다.


한 영웅의 최후

우당 장남 규학에게 준 백범 친필서명 사진
우당 장남 규학에게 준 백범 친필서명 사진 ⓒ 우당 기념관
1932년 상해에 머물고 있던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로 활동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그 타개책으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활동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완전히 장악한 뒤라 상해보다 더 위험했지만 이회영은 오히려 그곳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1932년 11월 초, 달이 환한 밤이었다. 이회영은 아들 규창과 단둘이 상해의 황포강 부두로 향했다. 규창은 아버지를 모시고 영국 선적 남창호에 올랐다. 이회영이 자리 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규창은 아버지가 무사히 안착하기를 빌면서 큰절을 세 번 올린 뒤 배에서 내렸다. 배가 대련으로 출항하는 것을 보고 규창은 동지 백정기와 엄형순에게 아버지가 무사히 떠났음을 전했다.

우당이 숨을 거둔 중국 대련 전 수상경찰서(현 대련항집단, 사진 속의 인물은 우당기념관 윤흥묵 이사)
우당이 숨을 거둔 중국 대련 전 수상경찰서(현 대련항집단, 사진 속의 인물은 우당기념관 윤흥묵 이사) ⓒ 윤흥묵
규창은 만주에서 아버지의 도착편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편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보가 왔다.

"11월 17일 부친이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

이회영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풍설이 구구하지만 당시 신문보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회영이 대련에 도착한 날짜는 5일로 기록되어 있고 사망한 날짜는 17일로 되어 있다. 67세의 이회영은 무려 12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회영은 심문을 받는 동안 한 마디도 발설치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입을 다물고 본적지 조회조차 거부했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를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의로운 투쟁이었다.

유족으로 유일하게 시신을 보았던 딸 규숙의 목격담이 이은숙 여사의 수기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 전하고 있다.

여식 규숙이가 대련에 도착하여 바로 수상경찰서를 찾아가 저의 부친 함자를 대니, 형사들이 영접은 하나 꼼짝을 못하게 지키고는, 여러 신문지국장들이 여식을 면회하고자 청하나, 허락을 안 해 주니 어찌하리오.

우당 72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내빈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우당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
우당 72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내빈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우당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 ⓒ 박도
당시 여식 22세로 저의 부친께서 모진 고문을 못 이겨 최후를 마치셨다는 의심을 가지고… 형사가 시키는 대로 시체실에 가서 저의 부친 신체를 뵈었다.

옷을 입으신 채로 이불에 싸서 관에 모셨으나 눈을 차마 감지 못하시고 뜨신 걸 뵙고 너무나 슬픔이 벅차서 기가 막힌데, 형사들은 재촉을 하고 저 혼자는 도리가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하고 유해를 모시고 신경(장춘)으로 왔으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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