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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딸 지운이입니다. 원재에게 어린이집에 갔다 와서 하루에 십분 동안 안아주기를 시켰는데 이젠 일주일에 한번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딸 지운이입니다. 원재에게 어린이집에 갔다 와서 하루에 십분 동안 안아주기를 시켰는데 이젠 일주일에 한번으로 바꿔야 합니다. ⓒ 강충민
딸아이의 얼굴 윤곽이 서서히 잡혀갑니다. 벌써 태어난 지 3주일이 넘었습니다. 첫째인 아들 녀석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면 복사본처럼 꼭 닮았습니다. 찬찬히 뜯어보면 아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눈꼬리가 처진 것이 저를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딸아이는 이제 우리 식구가 되었습니다. 이름도 지어 출생신고도 했고 주민등록번호도 부여 받아 이 땅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낳아만 다오, 다 키워 주마?

딸아이 이름은 '지운'이라고 지었습니다. 강지운. 처음엔 아들 녀석의 돌림자를 따서 '선재'라고 하고 싶었는데(아들 이름은 원재입니다) 작명소에서 'ㅅ'자가 들어가면 좋지 않다고 해 그 이름은 포기했습니다. 알 지(知)에 높을 운(夽), '지운'. 자꾸 부르니 참 마음에 듭니다. 흔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여자'라기 보다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름 같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외아들인 제가 스무 살을 넘기자 아버지께서는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 바람과는 반대로 서른셋,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아내가 애를 갖자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애를 다 키워줄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큰아이가 태어나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당신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부부가 갓난애를 키우며 밭일까지 하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임을 알게 되신 겁니다.

결국 큰아이 원재는 아내 사무실 근처의 애 보는 집에 아침마다 맡기고 저녁에 데려오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원재는 8개월 만에 태어난 조산아였는데 인큐베이터에 나온 지 한달을 갓 넘긴 무렵부터 그렇게 애를 맡겨서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흔히들 팔삭둥이라고 하는 일찍 세상을 본 원재입니다. 더할 나위없이 잘 자라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나이로 다섯살입니다.
흔히들 팔삭둥이라고 하는 일찍 세상을 본 원재입니다. 더할 나위없이 잘 자라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나이로 다섯살입니다. ⓒ 강충민
그러다가 애 봐 주는 집에서 사정이 생겨서 못하겠다고 해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다시 수소문해 마침 전업주부인 친구 아내에게 사정사정해서 애를 맡겼습니다. 그마저도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못 보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제가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습니다. 아내에게는 회사 그만두라는 말을 절대 꺼낼 수가 없더군요. 그 때문인지 원재는 항상 감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겨울에 찬바람 맞을까 봐 꽁꽁 포대기로 감쌌어도 말이죠.

그렇게 큰애는 이집 저집을 전전하다가 이모님 댁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맡기고 데려오는 것은 여전했지만 맡길 곳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것에서 해방되었기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심은 이종사촌동생의 아들, 그러니까 이모님의 친손자가 태어나면서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어린애를 봐 주는 놀이방에 맡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가 두 돌이 되어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게 되자 정말이지 두발 ‘쫘악’ 뻗고 잘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매정한 주말 부모'가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큰애를 키우고 둘째를 가졌을 때 우리 부부는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실 턱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 하나만 낳고 관둘 거냐고 성화셨지요. "아버지가 키워 준다면 낳을 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아내의 오빠, 즉 처남댁에 둘째 지운이를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것도 주중에는 아예 그 집에 맡기고 주말에만 우리집으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마침 처남댁은 전업주부였고 애 보는 비용은 당연히 지불합니다. 어떻게 갓난애를 떼어 놓고 잘 수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애가 둘이고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운이도 큰애 원재처럼 아침에 맡기고 저녁에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루에 네 군데를 다녀야 합니다. 아침에 큰애의 어린이집, 그리고 처남댁 그 다음에 출근, 다시 저녁에 역으로 반복하게 되면 적어도 아침 일곱시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제때 출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아침 일곱시에 문을 여는 어린이집은 없습니다. 결국 딸아이를 주중에는 아예 처남댁에 맡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육아휴직을 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제주에서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제주도의 취약한 산업구조상 10인 이하의 사업장이 대부분입니다. 아내의 출산휴가도 공식적으로는 3개월이지만 그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듯합니다. 잠정적으로는 두 달 출산휴가였는데 이제 연말정산이 코앞이라며 동료 직원들이 도와 달라고 성화여서 그마저도 열흘 일찍 출근한다고 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도 저를 포함해서 직원이 여섯명입니다. 육아휴직은 정말 대기업 직원 혹은 공무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저희들에게는 먼나라 얘기처럼 들립니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답답하게 우리 부부를 옥죄어 옵니다. 오죽하면 당신 친 손자손녀도 못 본다고 하는 저희 부모님에게 배신감까지 느꼈을까요.

올케는 애 둘인데 계속 회사 다닐 거니?

어제는 큰맘 먹고 유아용품점에서 모빌을 샀습니다. 작은애가 잠들어 있는 안방에다 모빌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모빌을 달고 있는 저를 보고는 한마디 합니다.

"(아이를 봐 주는) 오빠네 집에 달아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저는 멈칫했습니다. 다시 모빌을 내려놓고 베란다에서 애꿎은 담배만 피웠습니다. 아내도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애 목욕시킨 후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인천에 사는 막내누나 전화였습니다. 저랑 연년생이어서 평소에도 누나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는, 친구처럼 편한 누나입니다. 물 묻은 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통화를 했습니다. 애 안 아프고 잘 크냐는 일상적인 전화였는데 통화 중에 막내누나가 제 부아를 건드렸습니다.

누나는 "올케는 애 둘인데 계속 회사 다닐 거니?"하고 아무 뜻 없이 물었는데 순간적으로 저는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왜 니가 먹여 살릴래?"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뿔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지운이를 처남댁으로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빌은 우리집과 처남댁 두 군데에 달 생각입니다. 처남댁이라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언제 또 우리 지운이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걱정스럽습니다. 좀 매정하긴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애 보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을까 생각중입니다. 너무 야박한가요? 하긴 핏덩이를 떼놓고 돈 벌러 나가는 맞벌이 부부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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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주설문대설화를 공부했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강사, 여행사 팀장, 제주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하고 싶은일, 재미있는 일을 다양하게 했으며 지금은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문화관광해설사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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