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목가 들어서는 초입. 그저 식당과 민박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사목가 들어서는 초입. 그저 식당과 민박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 서정일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어보니 바닥에서 천정까지 온통 뿌리공예로 장식되어 있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사목가는 그렇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참을 작품 구경에 몰두하고 있으니 '어디서 오셨냐'고 묻는다.

"저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편 얼굴 보기가 어려워요."

부부지간에도 오이탁(53)씨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는 부인. 뒤쪽으로 가보라며 식당 후문을 가리킨다. 문을 열고 걸어가니 드디어 큰 괴목 뿌리들이 하나 둘 보인다. 그러더니 창고 곁에 동산만한 크기의 뿌리 더미가 쌓여있다. 식당에 가려 잘 안 보이던 창고. 오이탁씨의 뿌리공예 작업장이다.

"400여점 정도 있을 겁니다."

식당 내부는 온통 뿌리공예 작품으로 진열되어 있다.
식당 내부는 온통 뿌리공예 작품으로 진열되어 있다. ⓒ 서정일
식당 내에 진열되어 있는 작품들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답한다. 그러나 그 이상 대답은 미룬 채 하던 일을 마저하는 오씨. 샌딩작업이라 불리는 그라인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이곳은 동생이 운영하던 곳이지요 그러니까 한 30여년 되었네요."

사목가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동생인 오천탁씨의 이름을 들춰낸다. 동생인 천탁씨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손재주가 탁월해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뿌리를 잡고 시작한 게 뿌리공예.

형인 오씨는 틈틈히 동생을 도와 함께 작업을 했지만 필수품이 아닌 뿌리공예를 호구지책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 열정이 좀더 많은 동생에게 조각도를 넘겨주고 도회지로 나와 여러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IMF와 중국산이 동생을 흔들리게 했습니다."

오이탁씨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뿌리공예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근근이 이어오던 동생 천탁씨가 작업을 중단하고 떠난 계기를 설명했다. 3년여 전에 그런 동생의 뒤를 이어 사목가를 맡은 오씨는 아직도 동생의 솜씨를 최고로 쳐주고 있다.

괴목 뿌리들은 모두 저수지나 댐 공사할때 나온다고 한다
괴목 뿌리들은 모두 저수지나 댐 공사할때 나온다고 한다 ⓒ 서정일
하지만 사목가를 인수받아 운영한 3년여 기간 동안 부인의 얼굴을 잊어먹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뿌리를 다듬고 만들었다며 굳은 살이 박인 손을 내민다. 딱딱한 손 마디 마디는 그동안 오씨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뿌리공예에 매달렸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디에서 이런 큰 고목 뿌리들이 나오죠?"라는 질문에 저수지나 댐 공사를 할 때 많이 나온다면서 그것을 구입해서 잠깐 야적해 공기압으로 구석구석을 다듬고 기계톱으로 절단을 한 후 페이퍼 작업을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니스칠을 나무에 따라 여섯번에서 아홉번까지 칠한다고 한다. 그러면 마무리 되는데 그 기간이 길게는 두달까지도 간다고 하니 생각보다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듯 보였다.

뿌리공예를 정부에서 특산품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식당과 민박으로는 남도민박 베스트 50에 뽑힌 이곳이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작업에만 열중하는 오씨를 보면서 참 무던하다는 생각을 했다.

뿌리공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오이탁씨
뿌리공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오이탁씨 ⓒ 서정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