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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도르 마라이의 <성깔 있는 개>
ⓒ 솔
우리 사회에서 '개'란 특정한 의미로 규정될 수 없는, 경계 사이에 놓인 존재다.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개'는 '식욕'이라는 원초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야생의 존재'이며, 애견인들에게 '개'는 이미 문명사회에 포섭된 개별자다.

물론 개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야생의 존재'로 찍히느니, 옷과 신발을 갖춰 입고 공원으로 산책을 떠나는 '문명적 존재'가 되기를 바라겠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목줄이나 케이지에 익숙해져야 하며, 또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산도르 마라이의 <성깔 있는 개>에 등장하는 '추토라'는 이 같은 '야성'과 '문명'의 경계에 놓인 풀리 잡종견이다. 주인공인 신사(직업은 작가다)는 남편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않아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부인에게 추토라를 선물로 준다.

부인이 진정 원하는 "옥상 정원이 딸린 저택이나 적지 않은 액수의 외환, 값비싼 목걸이" 등을 해 줄 여력이 없는 그는 값싼 장신구나 의류 용품들이 결국에는 "삶의 거래에서 능숙하고 기민하지" 못한 자신의 "궁색한 처지"만을 드러낼 것이라 판단하고 의외의 선물을 과감하게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사의 집안에 발을 디딘 추토라는 배변 훈련과 개줄을 당당히 거부하고, "식구들의 생각과 시간을 온통 빼앗"으면서 "집안 질서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흔들어" 놓는다. "정확하게 짜여진 하루 일정표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는" 중산층의 기품 있는 일상생활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그 뒤 추토라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구에 대해 혐오감을 표현"하고, 개줄을 매라고 충고하는 "강대국의 딸" 앞에서 격렬히 저항하며, "신분 높은 여인과 여인의 승마 교관"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게다가 산책길에서 신사가 가난한 여인에게 느끼는 연민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으르렁거린다" 행동하지 않는 동정은 얼마나 값싼가 말이다.

이러한 추토라의 면면에서 신사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와 열정, 젊음을 발견하며, 이는 "소시민 특유의 경외심"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오히려 추토라가 "죽 한 그릇을 위해 인간과 맺은 계약"에서 벗어나 "굴욕스런 삶의 오욕"을 잊은 채 자유를 찾아 떠나기를 바란다.

마침내 산책길에서 추토라를 잃어버린 신사는 "알량한 적선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기쁨"까지 느끼지만, 추토라는 용케도 집을 찾아온다.

이렇듯 신사는 추토라를 통해 '자신의 삶', 더 나아가 '인간의 삶'까지 바라본다. 훗날 회상했듯 "추토라에게서 무한한 신뢰"와 "청춘의 모든 마법과 자유분방함을 선사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는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도무지 개에게도 고유의 성격이 있음을 인정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자들의 충고와 측근들의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 우편 배달부에 대한 추토라의 무차별적인 테러가 일어나면서 신사는 마침내 "너를 좋아하지만 굴복시키"겠다고 결심한다. 그 뒤 신사와 추토라는 '인간'과 '애완견'이라는 거추장한 '계급장'은 떼고, 존재 대 존재로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싸움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비릿한 슬픔만 남긴 채 끝나고, 추토라는 신사의 집에서 추방된다.

신사는 추토라가 떠나간 뒤 다른 순종견을 기르지만 순종적이기 짝이 없는 그 개를 결코 사랑하지는 못한다. 어느덧 세월 흘러 "억눌리고 완전하지 못하고 분노에 차 이를 갈며 싸우는 것, 풍습과 화의가 아니라 오점과 항의를 뜻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깨달은 신사는 추토라를 가슴 아프도록 그리워한다.

"짧은 자루 하나만 달리면 변기 청소용 솔로 안성맞춤"인 외모에, 전형적인 '헝가리 개'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한 성깔 있는 개 추토라. 소설을 읽다 보면 추토라는 다름 아닌 이 책의 저자 산도르 마라이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산도르 마라이는 독재 정권이 들어선 헝가리를 떠나 고독하고 쓸쓸한 망명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헝가리'와 '헝가리 어'에 대한 애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 뒤 헝가리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고국 출판사에서 러브 콜을 받지만, "자유로운 민주 선거가 실행된 다음에야 작품을 출판할 수 있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추토라가 개줄과 절대 복종을 거부한 탓에 신사와 슬픈 이별을 했듯, 산도르 마라이 역시 조국 헝가리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샌디에이고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신사가 두고두고 추토라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산도르 마라이의 작품을 통해 그를 추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안 듣는 개에게 '앉아, 일어서'를 가르치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서도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체 말 잘 듣고 애교 많은 개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깔 있는 개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솔출판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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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월간 잡지에서 편집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기자로 등록합니다. 제 관심 분야는 주로 문학에 집중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쓸 생각입니다. 딱딱하기보다는 단단한, 쉽고 재미 있으며 삶이 녹아 있는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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