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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성 PD. 녹화용 원고를 다듬는 자리에서 인터뷰를 했다. 잠시 카메라를 봐 달라고 주문하자 금방 '보도용 웃음'을 지어보인다. 저돌적인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자답지 않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소유자다.
남윤성 PD. 녹화용 원고를 다듬는 자리에서 인터뷰를 했다. 잠시 카메라를 봐 달라고 주문하자 금방 '보도용 웃음'을 지어보인다. 저돌적인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자답지 않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소유자다. ⓒ 곽교신
청주고인쇄박물관과 청주MBC는 자치단체와 지방방송으로는 적지않은 금액인 제작비 4억원을 과감히 공동 투자하여 장기간 취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12월 26일 저녁에 내보낸 방송을 통해 "활자로드"라는 새 용어를 야심차게 세계 서지학계에 던졌다.

프로그램은 소심한 국수주의에 안주해 금속활자 발명국으로서의 고려를 조명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동서유럽, 중국, 미국을 뒤지면서 역사 속에 파묻힌 조선 활자문화 서구 전파 가능성의 현장을 추적하고 관련 유명학자들의 의견을 냉정히 수용함으로써 고려 금속활자 주조술을 바탕으로 한 조선 세종대 금속활자의 유럽 전파 가능성을 치밀하게 검증해 나갔다.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활자로드'란 용어를 써가며 그 흔적을 사소한 것부터 면밀히 짚어 나간 것이다.

"활자로드"라는 말을 들으며 기자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용어도 없던 역사적 사실이 엉뚱하게도 지리학자에 의해 실크로드라는 실체로 정리되었듯이, 흥덕사지의 발견을 보도하다가 위대한 창조물 직지(금속활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한 방송인의 집념에 의해 "활자로드"라는 말이 태어난 것이다. 기자는 외롭고 무모해 보이는 그의 작업을 광활한 벌판에서 바늘을 찾는 작업으로 비유하면서 왜 직지연구 프로젝트가 국책사업이어야만 하는지를 말하고 싶다.

물론 활자로드라는 용어 자체의 적절성, 실체로서의 활자로드의 존재 가능성 등은 학문적 검증의 여지가 매우 많다. 그러나 활자로드라는 용어를 던져놓은 것 자체는 의미가 크다. 이는 마치 매년 초마다 우리의 심사를 뒤틀어놓으며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그저 황당할 뿐인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국제법상으로는 최소한의 효력이 있는 영토분쟁 상태의 유지인 것과 같다.

활발한 공론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이 아닐 가능성은 곳곳에 존재한다. 에디슨이 번개로 처음 탄소필라멘트 전구를 밝히던 날의 감격은 과학의 전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발명이라는 기록, 또는 발명이 아니라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앞에 썼듯이 구텐베르크 박물관 측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설을 애지중지하지 않는다.

남윤성 PD의 프로그램도 금속활자의 최초 발명국이 고려임을 입증하려는 문화국수주의의 시각으로 금속활자의 서양전파를 밝히는 것에 집착했다면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인류 문화사상의 혁신적인 기술인 "금속활자 인쇄술"이 일찍이 고려에 있었으며 그 기술의 서양전파 가능성에 대해 냉정하게 접근했다는데 뜻이 깊은 것이다. 이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 인쇄국으로서 문화적 자부심에서 비롯됨이기도 할 것이다.

직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

비록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가 있는 직지이나, 청주시는 소아적 국수주의로 직지를 바라보질 않는다. 필자가 만나 본 청주의 문화관계자들은 '제 1회 직지상'을 직지를 프랑스로 가져간 "꼴랭 드 쁠랑시"에게 주는 것도 옳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펼친다. 문화적 자신감이 넘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최소한 한국의 학자들에게라도 직지를 자유로이 열람시켜야하는 것이 프랑스의 도리다. 그런 배려를 아직 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에게 직지상을 주고 싶다는 청주시 문화관계자들의 생각은 가히 대범하기 그지없다.

청주시와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올바른 직지 사랑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거듭 경의를 표한다. 재차 주장하지만 이제는 청주의 이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직지와 금속활자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세계 유명 서지학자들 상당수가 "극동아시아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자 경악하더라는 남윤성 PD의 말을 대한민국 정부와 국내 관련 학자들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책입안자 또는 학자로서 양심의 방치이다.

서구 학자들이 고려의 금속활자를 모르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잘못이다. 직지의 가치를 제대로 몰라 "고려의 예쁜 딸 직지"를 조선 말에 프랑스로 입양보냈다. 이제 우리는 금속활자마저 독일로 입양시켜야할지도 모른다. 활자로드를 찾으려는 남윤성 PD의 취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세계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설을 대체로 인정한다. 정설로 확정할 학문적 근거를 찾고자하지만 근거 자료가 빈약해 회의에 머물 뿐이다. 최고(崔古)의 금속활자본 인쇄국으로서 이와 관련한 연구는 마땅히 국가프로젝트여야 한다.

금속활자 서구 전파 가능성을 밝히는 일의 중요성

금속활자 서구 전파 가능성을 제기하고 그 여부를 밝히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직지는 고려 금속활자본의 현존 실물일 뿐 직지가 고려 금속활자의 알파요 오메가는 아니다. 직지 이전의 기록인 상정예문(1234-1341)을 찍기 이전에도 고려에 이미 금속활자가 활성화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인쇄술은 당대의 혁신적인 첨단기술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불과 삼십여년 만에 전 유럽에 퍼질 만큼 최고의 인기있는 기술이었다. 그 유용성을 간파한 주교들은 인쇄공을 스카웃하기에 열중했다. 그런 인기는 극동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려는 유럽에서 극동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의 지배를 장기간 받았다. 몽고가 고려의 인쇄술에 착안했을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에서는 금속활자 인쇄가 출현하지 않았다. 활자주조 기술이 최고에 이른 조선 세종 때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가 불과 20-30년의 차이라는 것은 결코 학문적으로 간과할 일이 아니다.

고려 이후 조선 세종대에 꽃핀 금속활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실크로드를 따라가다가 어떤 경로를 거쳐 독일로 가고 고향 마인츠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재기를 노리던 사업가 구텐베르크에게 도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는 문화 흐름의 큰 축을 밝히는 중차대한 일이다.

토크쇼 녹화 직후. 왼쪽부터 사회자 강태재(직지포럼 대표), 마이발트(구텐베르크박물관 학예연구사), 송은아(서원대독문과 강사. 통역). 강 대표와 송은아씨도 오늘의 직지를 만든 공로자들 중의 하나다. 마이발트 박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구텐베르크 특별전 참관차 방한하였다. 오는 19일 오후 7시 청주MBC TV로 방송 후 홈페이지에서 3시간 후 동영상 검색이 된다.
토크쇼 녹화 직후. 왼쪽부터 사회자 강태재(직지포럼 대표), 마이발트(구텐베르크박물관 학예연구사), 송은아(서원대독문과 강사. 통역). 강 대표와 송은아씨도 오늘의 직지를 만든 공로자들 중의 하나다. 마이발트 박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구텐베르크 특별전 참관차 방한하였다. 오는 19일 오후 7시 청주MBC TV로 방송 후 홈페이지에서 3시간 후 동영상 검색이 된다. ⓒ 곽교신
사실 고향 마인츠로 돌아오기 이전에 인쇄업에 종사한 적이 전혀 없는 구텐베르크가 단기간에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서구 학자들에게도 미스테리다.

방한 중인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의 마이발트 박사에게 "구텐베르크가 발명자로 보느냐 사용자로 보느냐"는 간단명료한 질문을 던졌다. 마이발트는 통역을 통해 "독일, 한국, 중국은 모두 금속활자가 자국의 최초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구텐베르크는 다만 금속활자의 실용성(대중적 영향력)이라는 경주에서의 우승자일 뿐이다"고 역시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언론으로 통칭되는 "프레스(press)"의 어원이 구텐베르크가 개량한 누르는(press) 인쇄기계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는 통설에 대한 의견(자부심)을 말해달라는 질문에도 크게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의 답이 문화적 포용인가 순수 게르만 혈통이라는 그의 핏줄에서 비롯되는 게르만족 특유의 자신감인가.

마이발트가 보인 자신감 이상의 문화적 긍지는 "활자로드"라는 용어 하나에 다 녹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남 PD가 다큐 프로그램에서 고려 금속활자의 노하우가 조선 세종대에 꽃을 피우며 세종 때의 금속활자(기술)가 유럽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에 최종 목적을 두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환상적인 첨단 기술이었던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보유한 고려라는 걸출한 국가의 문화 흐름을 조명해보고 싶은 것이다.

한국(조선 세종대) 금속활자의 서구 전파 가능성 이론을 1925년에 세계 최초로 제시한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카터 교수이래, 역시 한국 금속활자의 서구 전파설을 언급해서 그 주장이 2001년 1월 <뉴욕타임스>에 게재되었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폴니덤'(Paulneedham) 교수는 보도 내용과 관련한 인터뷰를 약속했으나 취재진이 도착하자 '기자들의 과잉해석이었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단순히 문화 아이덴티티를 밝히거나 고수하려는 것만으로도 세계 각국의 노력은 때론 이렇도록 유치하고 폐쇄적이다. 아이덴티티의 확인은 문화 복속을 의미하고 그것은 영토 복속의 개념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중국의 발해 유적 발굴은 발굴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이 전체의 진행 정도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아니라 '정치적인 발굴'이다. 정치적인 발굴이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활자로드를 주목하자

1877년은 실크로드라는 말이 탄생된 원년이다. 어릴 때 강렬한 기억을 버리지 못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의 유적이 발굴되어 트로이가 신화에서 역사로 바뀐 때로부터 6년 후가 1877년이다. 트로이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한 지리학자의 머릿속 이미지가 실체화되면서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2003년 12월은 청주고인쇄박물관과 집념에 찬 한 방송인에 의해서 '활자로드'라는 용어가 태어난 원년이다. 남윤성 PD의 말대로 활자로드라는 말 자체의 학문적 적절성 여부를 따지는 학계의 공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탄생한 용어, '활자로드'를 생각하며 전설이 역사로 바뀐 트로이를 생각한다. 발굴되었지만 트로이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전설이다. 활자로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 용어가 외롭고 힘겹게 탄생했지만 학계의 축하는 받지 못했다.

필자는 이 조용한 용어의 혁명을 지켜보며 발전적인 비판과 진보적인 지원을 동시에 보내고 싶다. 세종 때의 금속활자 주조기술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주조술의 유사성을 추적해보고 싶다는 남윤성 PD의 여운이 매우 기대된다.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정서. 직지의 기록유산 등재에는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의 우정어린 노력이 있었다.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정서. 직지의 기록유산 등재에는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의 우정어린 노력이 있었다. ⓒ 곽교신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국립화는 이 모든 작업을 지속하는 제 일보이다. 직지와 갖은 난고 끝에 무형문화재로 일차 복원된 금속활자를 연구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 프로젝트이다.

타임(라이프)이 "지난 천년 동안 인류를 변혁"시킨 100대 사건의 제 1위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올려놓은 깊은 의미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국책프로젝트로 금속활자를 연구해낸 결과는 거대한 문화인프라를 구축하며 우리에게 상상을 넘는 경제적 이득으로도 돌아올 것이다.

우리 정부는 고려의 딸 "직지"와 무형문화재 "금속활자"와 세계를 대상으로 가냘프게 버티고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차분히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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