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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해금령(解禁令)

소림의 방장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방장실이 좁다고 느껴질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구파일방 대부분의 장문인들이 참석하고 있고 표물을 가져온 일행 모두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좌중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이제 물건을 내보이시겠소?”

백발(白髮)에 백염(白髥)의 노승이다. 백미를 따라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간 노승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의 방장인 광허선사(廣虛禪師)다. 송하령을 보는 시선은 그윽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시선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모두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 있사옵니다.”

송하령이 내미는 것은 봉서된 밀지다. 오랫동안 보관한 듯 유지(油紙)로 된 봉서는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봉서는 탁자 위에 놓이자마자 살며시 허공에 떠올라 광허선사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아미타불......! 우선....”

광허선사는 봉서를 조심스럽게 개봉하면서 좌중의 인물들을 둘러 보았다.

“먼길을 마다 않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각파 장문인들께 감사드리고, 봉서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오.”

봉서 안에서 나온 것은 봉서와 똑같은 재질의 누런 유지였다.

“이미 알고 계신 분도 계시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노납이 설명드리겠소이다.”

광허선사는 말과 함께 봉서 안에서 나온 밀지를 펴서 좌중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해금(解禁).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단 두글자. 그리고 그 밑에 날인된 커다란 인장(印章). 말뜻은 그저 금하고 있는 것을 푼다는 의미이지만 사연을 모른다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귀였다.

광허선사는 조심스레 탁자 위에 밀지를 내려 놓고 옆에 앉아 있는 도사(道士) 차림의 노인에게 밀지를 내밀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로한 모습의 노도사이나 종사(宗師)의 위엄이 살아 있는 모습이다. 이 노도사가 곤륜파(崑崙派)의 전임 장문인인 운룡상인(雲龍上人)이다.

“진위 여부를 판단해 주시지요.”

광허선사의 말에 밀지를 집어 든 운룡상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떤다. 젊은 나이로 곤륜의 장문직을 맡아 연로한 네개 문파의 장문인들과 보았던 그것이었다. 한창 젊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지 그의 노안에도 알 수 없는 빛이 흘렀다.

“맞소. 선황께서 보내온 밀지이고 당시의 옥새(玉璽)가 맞소.”

그 말에 광허선사는 부언한다.

“이 일에 대해 직접 아시는 분은 오직 곤륜의 운룡상인(雲龍上人) 뿐이시지요. 사십여년 전 그 회의에 참석하신 분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분입니다.”

곤륜 사상 가장 나이가 적은 삼십오세에 장문인이 되어 곤륜의 부흥에 힘쓴 인물이다. 곤륜은 중원의 외곽이랄 수도 없을 정도로 변방에 자리하고 있는 청해성 끝자락에 걸쳐 있는 곳이다. 그곳은 한인(漢人)들보다는 오히려 변방의 이민족들이 더 많은 곳이다.

그래서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는 첨병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곤륜의 무학은 실전적이며 패도적이기까지 했다. 언제나 이민족의 방파나 세력들이 준동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무량수불......결국 사십년간 지속된 초혼령이 이 시각부터 해금되는 것이외까?”

무당의 현진 곁에 앉아 있던 청수한 노도사가 탄식처럼 뇌까렸다. 무림의 양대 산맥인 무당의 현 장문인이자 현진의 사부인 청허자(淸虛子)다. 그 이름만으로 전 무림을 굽어 볼 수 있는 인물.

왜소한 체구이나 그를 본 사람들은 그가 왜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과 청수한 정기를 머금은 눈빛에 은연중 고개를 숙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중의 인물들은 그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초혼령의 해금이란 말에 어리둥절함과 놀람의 빛을 감출 수 없었다.

초혼령의 행사. 그것을 구파일방이나 무림문파에서 간섭하지 않고 있었던 것에 어떠한 곡절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셈이지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무슨 근심이 있어서일까? 대답을 하는 광허선사의 얼굴엔 한줄기 회한과 복잡한 기색이 교차되고 있었다.

“일개월전.... 노납은 황실(皇室)로부터 전갈을 받았소이다. 만약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초혼령의 해금령이 전달될 것이라는 말이었소. 그에 따라 여러분들이 오시길 기다렸고, 각파에 연락해 모여 주시길 부탁드린 것이외다.”

그랬었던가? 그래서 광허선사는 송하령에게 당연스레 봉서를 달라고 하였던 것인가? 헌데 황실에서 전갈이 왔다면 어째서 황실의 비밀감찰기관인 천관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강남 서가나 송가에도 같은 전갈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오.”

그 말을 확인하듯 광허대사는 서가화와 송하령을 주시했지만 두 소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저희는 내막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단지 방장 어른께 전달해 드려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지요.”

송하령의 대답에 광허선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하기야 황실과 무림계 사이에 얽혀 있는 비사를 아직 나이 어린 처자들에게 알려 주었을리 없다.

“아미타불.......”

광허선사는 나직히 불호를 외우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무엇이 광허선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가? 그 동안 사태만 지켜보던 사십대 중반의 인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가슴이 타고 있습니다. 방장께서 속시원히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본 장문인 역시 이 내막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답답하군요.”

종남파의 장문인인 종남일기(終南一奇) 사군명(史君明)이다. 종남오로(終南五老)의 공동제자로 젊어서부터 종남파의 천고기재로 각광을 받던 인물이 바로 그다.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종남파는 이 밀지가 작성될 당시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전대 장문인으로부터 초혼령의 행사에 개입치 말라는 전언만 들었다.

“아미타불...... 어차피 모두 다 해야할 이야기지요.”

광허선사는 감았던 눈을 뜨며 드디어는 그간 감추어져 있던 무림과 황실에 얽힌 비사(秘事)를 꺼내기 시작했다.

“상인께서는 노납의 말이 틀리게 되면 말씀해 주시지요.”

어차피 자신이 젊었을 적 보고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때 그 회의에는 자신이 참석하지 못했으니 참석한 유일한 인물인 운룡상인의 지적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태조께서 명을 건국하면서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은 대명을 흔들 위협세력으로 두곳을 지목하셨지요. 밖으로는 이 중원에서 쫒기어 갔다고는 하나 건재한 북원(北元)과, 안으로는 백련교도들의 내란 준동이었지요.”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중원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명 건국 홍무 원년에는 아직 하남성과 산동성도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원년 서달대장군으로 하여금 하남 및 산동성을 공격케하여 원의 대도(大都)까지 점령하게 됨에 따라 화중까지 점령하게 된 것이다.

그 뒤 홍무 4년에 탕화(湯和)대장군을 정서(征西) 장군으로 임명하여 중경(重景)을 점령할만큼 명 건국 초기의 중원통일은 강남을 중심으로 강북의 일부를 회복하였을 뿐 전 지역을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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