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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이 아니었다. 나는 '표식'의 터전. 숙주. 엠버를 유지하는 도구. 키퍼. 내 이름은 쿤이었지만…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나는 키퍼였으므로."

그런 세계가 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인간에게 수명이 있듯, 세계에도 명이 있어서 지금 한 세계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고. 그런데 어떤 '절대적인 힘'의 도움을 받아 세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말이다. 다만,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속해 있는 누군가가 '힘'을 나타내는 '표식'을 지켜야 한다.

표식을 지킨다는 것은 몸 안에 표식을 받아들인다는 것, 즉 '힘'의 숙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표식을 지닌 자를 키퍼(Keeper)라 부르며, 표식이 다음 키퍼에게 전해질 때 표식이 사라진 숙주, 즉 키퍼는 소멸하게 된다.

집단에 묻힌 개인의 자아

▲ 쿤. “키퍼인 나. 쿤인 나.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키퍼가 되기 위해 키워졌으므로.”
ⓒ 김미정
유시진이 지은 만화 <폐쇄자>의 주인공 '쿤'은 엠버(Ember)를 지키는 키퍼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키퍼로서 키워진 그는 쿤이라는 이름이 아닌 키퍼, 엠버의 수장으로 불릴 뿐이다. 쿤 자신도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을 때, 쿤을 일깨우는 존재가 나타난다.

엠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샨카'를 만나면서 쿤은 새롭게 눈뜨게 된다. 쿤은 샨카를 통해 자아를 되찾지만, 메이지(쿤의 종족)들은 불안에 떨게 된다. 쿤과 샨카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엠버에 위협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쿤은 어린 시절부터 온통 키퍼에 관한 얘기만 들어왔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다.

"잊지 마세요, 쿤. 당신은 키퍼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이 엠버가 유지될 것이며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들이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세요. 당신은 결코 당신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죽을 때까지 당신은, 세계의 유지자 - 생명의 보호자라는 것을."

▲ 샨카. “그야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키퍼라고 불리길 원했다면 키퍼라고 했겠지, 그때. 그렇지만 당신은 쿤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불리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 김미정
오직 키퍼로서의 삶만을 강요받은 쿤에게 색 바랜 잿빛 세상 엠버('ember'의 사전적 의미는 '타다 남은 것')에서 오로지 샨카만이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진다. 그녀는 키퍼가 아닌 쿤으로서 존재하고픈 욕망을 알아채고 그를 일깨워주는 존재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건으로 쿤은 샨카를 잃고 만다. 그 후 쿤은 기억을 잊은 채 엠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 쿤을 돌보는 것은 엠버의 '히이사'라는 이로, 키퍼를 찾으러 온 이들과 갈등을 빚는 인물이다. 표식을 찾으러 온 이들과 쿤, 히이사 사이에 표식을 둘러싼 결투가 벌어진다.

쿤에게는 키퍼로서 죽나 쿤으로서 죽나,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들(히이사를 제외한)에겐 전혀 다른 문제다. 한쪽은 엠버의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다른 한쪽은 공멸(共滅)이다. 그들은 쿤에게 "어떻게 해도 당신이 죽는다면, 그렇다면, 엠버를 위해 표식을 넘겨주고 죽어라"고 요구한다.

지성과 감성의 매력적인 조화

조금은 복잡하면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 구조. 유시진의 <폐쇄자>((주)서울문화사)가 판타지 만화로 불린다면 그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폐쇄자>는 악당과 기사, 거대한 괴물이 등장하고 모험이 가득한 판타지물이 아니다.

몇몇 판타지물의 요소를 배경으로만 삼았을 뿐, 오히려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한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개인과 집단,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 사이의 갈등관계를 세심하게 풀어내는 현실성 가득한 만화라고 볼 수 있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내가 없으면 그 누구도, 이 세계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생각만큼 멋진 일일까.

"당신은 당신 개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표식'의 생존입니다. '표식'을 위해서 당신은 존재합니다. 그것이 키퍼입니다"라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쿤은 과연 행복했을까.

모두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그들이 소중히 하는 것은 쿤이 아니라 키퍼일 뿐이다. 쿤은 결코 키퍼가 되고 싶다고 열망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한 세계가 존속하느냐 마느냐가 단 한 명의 손에 달려 있다는 설정은 현실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만화는 어디까지나 만화. 세세한 설정까지 따지면 몰입할 수 없다. 대신 '키퍼'라는 자리에 각기 다른 이름의 최고 지위를 대입시켜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물론 현실 세계의 키퍼들은 자신의 의지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폐쇄자>는 작가 특유의 사고가 흠뻑 녹아 있는 만화다. 유시진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차가울 만큼 냉정하게 그려내는 데 능숙하다. 또한 자아의 깊숙한 부분을 툭툭 건드리는 듯한 심리묘사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면서도 극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유시진표 만화의 매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폐쇄자>는 만화 이상의 무엇을 느낄 수 있는 만화다.

폐쇄자 the Closer 1

유시진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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