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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모래밭
섬진강 모래밭 ⓒ 조경국
집을 나선다. 황토재를 너머 횡천을 지나 하동으로 간다. 하동서 섬진강을 따라 간다. 여유가 있으면 악양들을 내려 보고 있는 최참판댁에도 들렀다가 화개장터를 지나 쌍계사 석문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면 불일 폭포, 칠불암으로 발길을 돌린다.

섬진강을 따라 가는 19번 국도는 벌써 골 백번도 더 왔다 갔다 했으니 질릴 법도 한데 항상 어디에 홀린 듯 넋을 잃는다. 섬진강 구경의 제철은 벛꽃 흩날리는 3월, 4월이라지만 그것은 섬진강의 진면목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사시사철, 경치는 물론이고 소리도 냄새도 감촉도 다르다.

겨울이 다가온다. 겨울이 되면 지리산을 넘어 오는 삭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섬진강 흰 모래밭을 걸어 보는 것도 재미다. 하지만 그 재미 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그냥 생겼겠는가. 먼저 배부터 든든하게 하고 재미를 볼 일이다. 따뜻한 남도라지만 허기진 상태로 겨울 섬진강 모래밭을 배회하는 것은 건강에도 해롭다.

하동은 ‘맛’의 천국이다

팥칼국수. 김치와 소금 이외엔 아무것도 없지만, 단촐한 만큼 팥칼국수 맛은 담백하고 진하다.
팥칼국수. 김치와 소금 이외엔 아무것도 없지만, 단촐한 만큼 팥칼국수 맛은 담백하고 진하다. ⓒ 조경국
하동만큼 맛난 것이 많은 곳도 있을까. 한번 훑어나 보자.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이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라 극찬한 재첩국이 있고, 섬진강 참게로 담근 간장 게장은 그냥 생각만 하고 있어도 군침이 돈다. 나랏님에게도 진상되었다는 투명한 은어만 있느냐,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가을 전어도 있다.

옛 이야기지만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하갯골에서 내려오고 (중략)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이들이 올라”(김동리의 <역마> 중에서) 왔던 화개장터가 있는 하동 땅이 아니었던가. 하동은 여행의 맛뿐 아니라 객들의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맛도 있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 탁자라고 해봐야 4개 뿐인 작은 식당이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 탁자라고 해봐야 4개 뿐인 작은 식당이다. ⓒ 조경국
겨울 섬진강 찾았으면 할매죽집 팥칼국수 맛부터 보자

유명하니 맛보기 쉬운 것들은 뒤로하고 겨울 섬진강을 찾았다면 하동 장터 ‘할매죽집’에서 팥칼국수 한그릇 하고 길을 나서자. 재첩이나 참게장이나 은어회, 전어회도 제철이 지났으니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도 좋다.

간판도 전화도 없는 할매죽집 팥칼국수를 먹으려면 장터 사람들 아무에게나 물어 봐도 길이 나온다. 탁자라곤 네개밖에 없는 작은 식당에 들어서면 주인 할머니가 인자한 모습으로 손님을 반긴다. 넉넉한 절의 공양주 보살님 같다.

빠꼼 열린 문으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온다. 고소한 팥죽 냄새가 바람을 타고와 점심 거른 위를 깨운다. 허름한 식당 안의 세간 살림이 모두 할머니 나이 쯤 되어 보인다. 양푼이 하나, 숟가락 하나에도 팥죽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낡고 초라한 이곳에서 천 원짜리 두 장으로 허기를 채우고 갔을까.

유순희 할머니가 4년 동안 사용한 칼과 도마. 할머니의 손맛이 나오는 곳이다.
유순희 할머니가 4년 동안 사용한 칼과 도마. 할머니의 손맛이 나오는 곳이다. ⓒ 조경국
팥칼국수를 주문하니 “탁탁탁” 칼이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큰 사발 가득히 팥칼국수가 담기고 김치, 소금이 딸려 나온다. 다른 것은 없다. 정말 그 뿐이다.

그 빛깔만큼이나 진하고, 반찬 가지 수만큼이나 담백한(?) 팥칼국수 맛은 지리산 아래서 자란 팥과 유순희(72), 유숙자(64) 할머니의 손끝에서 나온다. 빼고 더하고 할 것이 없는 맛이다. 종지에 담긴 소금도 필요 없다. 팥을 끓여 껍질은 고운 체에 걸러내고 다시 한번 끓이기 때문에 눅눅한 맛도 비릿한 맛도 없다.

이렇게 맛난 것을 내면서도 할머니는 남편 여의고, 자식 다 키워 놓고 허름하게 팥죽 장사하는 것이 손자들 보기도 부끄럽다 하신다. 싸고 맛난 음식으로 배고픈 사람 배 따숩게 하는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딨을까.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늙은 호박을 손질하고 있는 유숙자 할머니. 그릇을 들고와 사갈 만큼 호박죽 맛도 끝내준다.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늙은 호박을 손질하고 있는 유숙자 할머니. 그릇을 들고와 사갈 만큼 호박죽 맛도 끝내준다. ⓒ 조경국
뜨거운 팥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아랫배까지 후끈 데운다. 한 그릇 먹고 나면 새벽 장터 나온 장돌뱅이의 굽은 허리도 펴지겠다. 배 곯고 추위에 떠는 나같은 여행객들의 원기를 돋우는 데도 이만한 것은 없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 손님이다. 셈을 치르려니 “총각, 돈 안 받을끼다. 그냥 가소”하신다. 남루한 차림으로 카메라 하나 들고 돌아다니는 총각(?) 모습이 안타까우셨나 보다. 할머니께서 기어코 돈을 받지 않으시겠단다. 총각이 아니고 딸이 둘이나 있는 애 아범이라 하니 더욱 손사래를 치신다.

그냥 갈 수 없어 설거지하는 할머니 뒤편에 살며시 두유를 놓고 돌아섰다. 배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다. 내 행색이 그렇게 초라한가. 그길로 나와 거울부터 봤다. 입가를 보니 아이 자장면 먹은 듯 팥죽이 잔뜩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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