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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내림길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미시령 내림길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 박도
20년만에 다시 찾은 백담사

남설악 오색 숙소에서 하룻밤을 잔 후 창문을 열자 추색에 물든 경치가 한눈에 빨려들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좋은 아침이었다. 숙소 지하에 온천이 있다기에 내려갔으나 여태 문을 열지 않았다. 6시 30분에 문을 연다고 한다.

잠시 기다리자 6시 30분, 그제야 문을 열었다. 뜨거운 온천수와 차가운 탄산수를 번갈아가면서 온몸에 끼얹자 몸이 더욱 가뿐했다.

어제 대포항에서 산 감자시루떡과 라면으로 가볍게 아침을 든 후 행장을 차려 다음 행선지로 나섰다. 이대로 한계령을 넘은 후 내설악 백담사를 거쳐 미시령을 넘어 외설악에 들를 예정이다. 그야말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을 바라보는 주마간산 아니 '주차간산(走車看山)' 격이다.

한계령 정상에서 바라본 남설악
한계령 정상에서 바라본 남설악 ⓒ 박도
옛 사람들은 상상치도 못할 여정이다. 그분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아마도 축지법을 쓰는 도인으로 알게다. 산 지 10년이 넘은 프라이드 승용차는 비탈이 심한 한계령을 잘도 오른다. 오르막길에 쉼터가 있어 잠시 차를 세우고 언저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계령 정상 일대는 이미 겨울 풍경이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는 차는 경차로 아주 천천히 한계령을 오르내렸다. 쉼터에서 살펴보니 쉰은 넘은 듯한 여인이 서른이 될 듯한 시각 장애인 아들을 태우고 쉬엄쉬엄 오르내리면서 언저리 일대의 풍광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으로 본 경치를, 아들은 마음의 눈으로 전해 듣는 그 모습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단풍보다 더 아름다웠다.

병풍처럼 둘러싼 장수대의 바위들
병풍처럼 둘러싼 장수대의 바위들 ⓒ 박도
다시 한계령 정상 휴게소에 머물며 차 한 잔을 마신 후 내설악 계곡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필자가 학생들과 함께 10여년 동안 거의 해마다 수학여행 길에 들렀던 곳으로 눈에 매우 익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어느 한 해는 차가 진창에 빠져서 고생했던 일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그때 그 녀석들도 이제는 모두 마흔이 넘었을 게다.

다시 머문 곳이 장수대로, 이곳은 대승폭포의 물이 한계천으로 흘러드는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설악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달래고 명복을 빌고자 산장을 세우고 '장수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백담사 현판
백담사 현판 ⓒ 박도
원통 한계리 삼거리에서 내설악 백담사로 가고자 차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거기서 왼쪽은 홍천 방면이다. 이곳은 황태의 산지로 길섶 가게마다 온통 '황태'란 말로 도배하다시피했다. 점심은 아무래도 이곳 특산물인 황태로 해결해야겠다고 미리 정했다.

백담사 들머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담사행 셔틀버스를 탔다. 20년 전에는 들머리 용대리 마을에서 백담사까지 십여리 길을 한 시간 남짓 꼬박 걸어갔는데 이번 길은 용대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아주 편하고 쉽게 백담사 어귀에 이르렀다. 차창 너머로 백담 계곡의 가을경치가 절경이었다.

"내설악을 대표하는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1년(647년)에 자장이 세운 장수대 부근의 한계사라는 절이었는데, 창건 이래 1783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친 화재를 만났으며 그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비금사, 심원사, 운흥사, 선구사, 영축사 등 이름을 바꾸었다.

거듭되는 화재에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몇 개 있는지 세어보라고 해서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였다. 그래서 못 '담(潭)'을 넣어 '백담사(百潭寺)'로 이름을 고쳤는데 그 이후로 화재가 없었다고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3 동해·설악>(돌베개)


백담사의 대법당 '극락보전'
백담사의 대법당 '극락보전' ⓒ 박도

조물주의 빼어난 솜씨, 울산바위

백담사 경내의 만해 한용운 스님의 흉상
백담사 경내의 만해 한용운 스님의 흉상 ⓒ 박도
백담사, 하면 근대 고승이자 독립운동가요,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님이 머물며 <불교유신론>을 집필하였던 절이다.

지금도 이 절 곳곳에는 만해 한용운님의 흉상, 시비, 만해기념관, 만해교육관 등 만해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해 선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 화엄실에 머물고 간 흔적을 백담사 측에서는 기념 삼아 마련해 두고 있다.

두 평 되는 좁은 방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거처하면서 썼던 이불, 옷걸이, 거울, 촛대, 옷, 목욕했던 플라스틱 대야 등 초라한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그리고 방문 앞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곳입니다"라는 팻말이 있다.

만해의 얼을 자랑하는 백담사에서 만해 스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해가 되지 않다가도, 모든 중생을 껴안은 분이 부처이기에 속 좁은 나그네는 한참 뒤에야 이해가 되었다.

'인생무상', '권불십년'이라고 하더니, 대궐 같은 청와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가 이곳 저 좁은 방에서 지낼 때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화엄실 방 한 칸에 전시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가재도구들( 이 방이 거실이었다고 함)
화엄실 방 한 칸에 전시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가재도구들( 이 방이 거실이었다고 함) ⓒ 박도
하지만 온 백성들의 관심 속에 명산대찰에서 오랫동안 죄닦음을 하였다면 그 동안 부당하게 모은 재물은 모두 국고로 돌려주든지, 사회에 돌려주지 않고, 지금도 당신은 한 푼 없다고 '내 배 째라'하고 있으니, 수도도 할 사람이 해야 하나 보다. 전 전 대통령의 백담사 생활은 '말짱 도로 아미타불'이 된 성싶다.

20년만에 찾은 백담사도 겉으로 엄청 달라졌다. 어귀 돌다리부터 새로 세운 것으로 대법당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빼고는 모두 새로 세우거나 크게 보수한 것 같다.

절도 교회도 성당도 너무 호화로워지고 커지면 오히려 신심(信心)이 멀어지지 않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셔틀버스는 용대리 매표소에 내려주었다. 용대리 밥집에서 황태구이로 점심을 든 후 외설악으로 가고자 미시령으로 향했다.

미시령은 조선 성종 24년(1493년)에 열린 길로 기록돼 있으나, 거의 폐쇄되다시피 버려졌다. 설악권의 발달로 1989년 다시 개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겨울철 눈이 내리면 걸핏하면 통금이 되기에 요즘 한창 도로 확장과 아울러 터널을 뚫어 새 길을 내고 있었다.

미시령 정상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미시령 정상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 박도
사람이 편하고자 온통 국토를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백두대간을 비롯한 전 국토가 온전치 못하다. 이곳 일대도 군데군데 '백두대간법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오히려 주민들이 찬성해야 할 백두대간법인데 '결사반대'라고 하니, 잘 이해되지 않았다.

미시령에서 보는 외설악, 특히 울산바위가 압권이다. 조물주의 솜씨가 정말 야단스럽도록 빼어났다.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려다가 이곳에 주저앉게 되어 '울산바위'가 되었다는 전설과 설악산에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바위산에 부딪혀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리를 내므로 '울산' 또는 '천후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외설악 소공원에 이르자 관람객으로 붐볐다. 갑자기 많은 사람을 보자 헤집고 다닐 마음이 싹 가셔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숲은 봤으니 나무 보는 일은 다음해로 미뤘다.

돌아오는 길에 낙산 바닷가와 인구 죽도를 한 바퀴 돈 후 쪽빛 바다를 가슴에 한 아름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설악산 신흥사로 가는 길, 한창 떨잎이 지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로 가는 길, 한창 떨잎이 지고 있다 ⓒ 박도

망망대해의 쪽빛 동해바다
망망대해의 쪽빛 동해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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