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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벅수장승이 세워져 있는 고내리 마을
입구에 벅수장승이 세워져 있는 고내리 마을 ⓒ 김학수

동쪽벅수 화정려(火正黎)
동쪽벅수 화정려(火正黎) ⓒ 김학수

남쪽벅수 남정중(南正重)
남쪽벅수 남정중(南正重) ⓒ 김학수

무심코 돌아서려는데 의아한 비석 3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뜻하지 않게 이 동네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주둔지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고돌산진의 3명의 수군장군 공덕비
고돌산진의 3명의 수군장군 공덕비 ⓒ 김학수


고돌산진(古突山鎭)

옛날 수군진(水軍鎭)으로써 설치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태종8년 정월)기록에 돌산포만호(突山浦萬戶)의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말 또는 적어도 이조초에 설진(說鎭)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구방어에 힘을 기울여 남해안의 수군진을 대폭증설하여, 서기 1611년(광해군3년)에는 옛날의 돌산포진을 고돌산진으로 개칭하여 새로운 수군진을 출발시키고 권관(權官)을 두었다가 그 후 별장(別蔣)으로 낮추었다고 함.


고돌산진 고내리 전경
고돌산진 고내리 전경 ⓒ 김학수

이런 내용문을 보고서 좀더 자세한 유래를 찾아보기 위하여 동네 어른들이 계실 법한 노인정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채봉(72), 차영철(73), 최천석(72) 할아버지들을 만나 뵙고 이 동네의 역사적인 유래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마을의 김채봉,차영철,최천석 할아버지
마을의 김채봉,차영철,최천석 할아버지 ⓒ 김학수

원래 이 동네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돌산진이라 해서 우리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그 규모가 엄청난 수군기지였단다. 당시 이곳에 김씨, 차씨, 박씨 성을 가진 3명의 엄호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고, 대신 대포가 달린 큰 전함을 지휘하던 장군과 나머지 두 장군은 보급선을 지휘하던 역할을 수행했다 한다.

전함이 있었던 고돌산진 모습
전함이 있었던 고돌산진 모습 ⓒ 김학수

그때 불리던 고돌산진이라는 지명이 지금은 고진리(古鎭里)로 불리고 있으며, 이 마을을 에워싸고 큰 토성(土城)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성 바깥 동네를 고외(古外)리,성 안쪽 마을을 고내(古內)리라 부르고 있다 한다.

토성의 능선이 보이는 고내리 마을
토성의 능선이 보이는 고내리 마을 ⓒ 김학수

옛날 성의 모습이 남아 있을 때만 해도 이 두 마을 사람들이 합해서 '성'제를 지냈는데 차츰 성의 형태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고내리 사람들만이 뜻을 모아 제를 지낸다고 한다.

토성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마을 뒤편의 성터에 가 보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성의 형태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바위 덩어리만이 이곳이 성터였다는 것을 말해주듯 가을 억새의 흔들림 속에 가려져 있었다.

남겨져 있는 바위가 성터 였음을 알려준다
남겨져 있는 바위가 성터 였음을 알려준다 ⓒ 김학수

밭의 넓이를 넓히려는 농부의 작은 욕심이었을까? 우리 후손들에게 잘 보존해서 문화유산으로 남겨줘야 할 이 토성이 농부들의 조금씩 땅 넓히기 때문에 성의 형태가 깎여나가고 있는 실정이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관계 시(市)의 담당부서에서 이러한 사라지는 문화재를 관리해야 할 작은 의무에 충실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취재 도중 멀리 보이는 성을 가리키며, 옛날을 회상하시던 차영철 할아버지의 모습이 환한 미소로 간직될 수 있도록.

차츰 밭으로 변해가는 토성의 모습
차츰 밭으로 변해가는 토성의 모습 ⓒ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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