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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흥사 연화감. 감속에 작은 감이 있다.
ⓒ 강형구
몇 해 전 우연히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에 들려 거기 있는 한 그루 특별한 감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스님이 연화감을 아느냐고 대뜸 물었던 것이다.

'연화감이라?'

단감, 장두감, 꼬치감, 반달감, 찰감, 먹감, 배암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연화감은 생소한 것이었다. 의아스런 눈빛을 보내자 스님은 높다랗게 자란 한그루 감나무를 가리키더니 그중 빨갛게 익은 감 하나를 따서 물렁거리는 속살을 벌려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안을 들여다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큰 감의 속살 한 가운데 촛불같이 새빨간 작은 감이 다소곳이 머금은 붉은 연꽃마냥 선정 삼매경에 빠진 듯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연화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멀리 경상남도 부산에 운흥사를 다니는 젊은 아가씨 불자 하나가 있었다 한다. 그녀는 운흥사에 와서 감속에 또 하나의 작은 감이 들어있는 연화감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고는 부산으로 돌아가 친한 친구에게 감속에 또 하나의 감이 들어있는 신기한 운흥사 연화감 이야기를 했다.

▲ 연화감을 올려다 보고 있는 운흥사 혜원 주지스님
ⓒ 강형구
그러자 친구는 감에 또 하나의 감이 들어있는 그런 감은 세상에 없다면서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는 허튼소리 말라며 다그쳤다.

" 이 가시나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치?"
" 아니란 말이다. 운흥사에 가면 진짜로 감속에 작은 감이 또 하나 들어있는 연화감이 있단 말이다."
" 그럼 너 나하고 내기하나 할 수 있니?"
친구는 대뜸 그녀에게 내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 무슨 내기?"
" 만약에 전라남도 나주 운흥사에 감속에 작은 감이 들어 있는 그런 연화감이 있다면 내가 너에게 텔레비전을 한대 사주고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에게 텔레비전을 한대 사주기로 하자. 내기 할 거니?"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친구와 내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 내기를 약속했던 때는 이미 초겨울이라서 연화감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둘은 이듬해 가을에 운흥사 연화감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긴 겨울이 가고 새로 감꽃 피는 봄이 오고 풋감이 살져 오르는 폭염의 여름이 가더니 이윽고 가을이 왔다. 둘은 그때까지 서로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가을 감이 붉게 익어가는 시절 둘은 부산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운흥사를 향해 함께 오게 되었다. 운흥사에 도착한 그녀들은 주렁주렁 익은 감 하나를 따서 떨리는 마음으로 물렁한 벌건 감속을 벌렸다. 보드랍고 붉은 감의 살 속에 작은 또 하나의 감이 앙증맞게 도사리고 앉아 있지 않은가!

▲ 운흥사에서 최근 발굴된 11.2cm의 금동여래입상
ⓒ 강형구
제 눈을 의심하며 친구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면서 계속 몇 개의 감을 그렇게 벌려 속을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친구에게 내기에서 이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기에서 지면 텔레비전을 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는 않았다. 그냥 친구 사이에 재미있는 장난 한번 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그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내를 만나 결혼을 한 친구는 즐겁게 신혼 생활을 보냈고 드디어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친구가 결혼도 하고 이어 아이를 가졌다고 하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친구가 산부인과 병원을 다녀오고는 얼굴이 샛노랗게 질려 그녀에게 말했다.

"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단 말이니?"
" 무슨 일이 있어 그러니?"
" 뱃속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없다는 거야."
" 정말?"

▲ 운흥사 대웅전
ⓒ 강형구
상상임신이라도 한 것일까?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임신의 여러 징후가 나타나는데 정작 있어야할 태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친구는 그 일을 심각하게 고민했고 드디어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운흥사 연화감을 떠올리고는 그 길로 스님을 찾아왔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이 연화감은 우리 덕룡산 산신님이 주신 신성한 감입니다. 애초에 연화감에 대하여 말을 할 때 두 분이 서로 이긴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사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어겼으니 의당 당연한 인과응보의 대가를 받은 것이지요."
" 그럼 스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친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 그러면 약속한 친구에게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텔레비전을 한 대 사드리시지요."

▲ 운흥사 할머니 석장승
ⓒ 강형구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부산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중고 텔레비전을 한대 사 주면서 내기에 진 옛 약속을 지켰다. 그 뒤로 건강을 회복한 친구는 즐겁게 결혼 생활을 하였고 이듬해 아이를 다시 갖게 되어 건장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감속에 작은 감이 들어 있는 연화감. 요즈음 자기 스스로 내뱉은 말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사람이 많다. 특히 정치가들의 선거 공약은 말 그대로 선심성으로 대부분 거짓말이기 십상인데다 또 국민들도 으레 그러는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리고 만다.

참으로 심각한 증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운흥사 연화감 이야기도 말에 대한 책임감과 약속이란 개념이 자꾸 흐릿해져만 가는 이 불신의 시대에 약속의 소중함과 그 엄연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리라.

차로 유명한 다성 초의선사가 어려 이모의 손을 잡고 출가한 곳이기도 한 운흥사는 백제 때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에 의하여 화엄사와 함께 창건되고 신라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번성기 때는 500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 운흥사 할아버지 석장승
ⓒ 강형구
입구에 할아버지, 할머니 석장승이 서있는 운흥사는 6·25 때 화재로 전소되어버린 것을 혜원 주지스님이 최근 부임하여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창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운흥사 대웅전 터에서 5-6세기로 추정되는 11.2cm의 작은 금동여래 입상이 출토되어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 운흥사 입구에는 돌다리와 사미승에 얽힌 신비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돌다리는 자세히 보면 남근석으로 제작되었다. 아마도 풍수에 얽힌 비보설에 의하여 그렇게 조성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옛날 융성했던 때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전남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에 가면 연화감이 사위어가는 이 추운 늦가을을 등불인양 몸 안에 아가 같은 빨간 불심지 하나씩을 켜들고 해산일을 기다리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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