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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의 기린상
이화원의 기린상 ⓒ 김형태
8월 13일 낮 12시쯤 이화원으로 출발했다. 이화원은 북경의 서북쪽 교외에 위치하며 총면적 290㎡의 중국을 대표하는 황실 정원의 하나다. 청나라 말에는 중요한 정치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했단다.

1750년 건륭제가 원명원과 함께 건설하기 시작한 청의원이 그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건륭제 전성기에는 원명원(圓明園), 창춘원(暢春園), 정의원(靜宜園)과 합쳐서 '삼산오원(三山五園)'이라고 불리는 광대한 별장(이궁)의 일부였으나, 1890년에 영불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페허로 변했다고 한다. 그 후 서태후가 권력을 잡자 해군의 군비를 유용하여 청의원을 복원하여 이화원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이화원의 용상.
이화원의 용상. ⓒ 김형태
정문인 동궁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황제가 정사를 관장하는 장소였던 인수전(仁壽殿), 그 오른쪽에 있는 것이 덕화원(德和園)인데, 이곳에는 3층 건물의 경극 무대가 있으며 당신의 경국 의상이나 생활용품, 서태후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덕화원 서쪽에는 동서로 뻗어 있는 길이 728m의 장랑(長廊)이 있는데, 그 난간에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삼국지>와 <서유기> 등의 명장면이 그려져 있다.

쿤밍호에서 바라본 만수산의 불향각
쿤밍호에서 바라본 만수산의 불향각 ⓒ 김형태
장랑의 북쪽에 있는 만수산(萬壽山)에는 불향각이 있다. 불향각은 20m 높이로 돌로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높이 41m의 목조 건축물로 이화원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이화원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쿤밍호를 내려다볼 수 있다. 호수 중앙에 놓여 있는 17공교(孔橋)의 난간에는 500여 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다.

서태후, 그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다. 미관말직인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1851년 함풍제의 후궁이 되었다. 아들을 낳은 것은 물론이고 총명한 머리로 인해 함풍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후궁이 된 지 십 년만에 함풍제가 죽고 어린 아들 동치제가 황제에 오르자 섭정을 시작한다. 동치제는 이름뿐인 황제였다. 그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밀려 베이징의 환락가를 탐닉하다가 18세의 나이로 죽는다. 어린 황후는 임신을 했지만 시어머니의 등살과 그늘에 밀려 결국 출산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곁으로 가고 만다.

권력의 맛을 본 서태후는 아들이 죽자, 3살인 조카 광서(光緖)를 황위에 올리고 섭정을 계속한다. 그녀는 조카가 성장하면서 의식의 눈을 떠가자 결국 궁중에 유폐시켜 그 존재를 잊게 한다.

그녀는 이미 서구열강과 한족에 밀려 기울어 가는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를 어떻게든 다시 부흥시켜보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쳤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단에 빠졌으며 무엇보다 정책보다는 황권에만 집착하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화원의 중심인 불향각
이화원의 중심인 불향각 ⓒ 김형태
그녀는 1908년 11월 자신이 유폐한 광서제가 죽은 이틀 후 죽고 만다.

서태후를 보며 누구는 인수대비나 문정왕후를 기억해내고 또 누구는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를 떠올린다. 누구를 떠올리고 누구와 비교하든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의 일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이화원 곳곳을 둘러보았다. 서태후가 차를 마셨다는 곳에도 들러 차를 마시며 차에 대한 설명도 듣고 각종 중국차를 구경하였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반대편으로 갔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고 날씨는 무덥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 비하면 북경은 자연 조건 면에서 축복받지 못한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배편으로 돌며 본 호수도 참으로 넓디 넓은데 이것은 전체 호수의 4분의 1에 불과하단다. 들어보니 서울의 양천구 정도의 면적이 될 것 같았다.

북경에는 산이 거의 없다고 했다. 큰 강도 없단다. 그래서 서태후는 이 드넓은 평지를 파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단다. 가이드는 이 큰 호수를 사람들이 달려들어 맨손으로 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을 파낸 흙이 바로 산을 이루었는데 그 산이 바로 만수산이란다.

만수산에서 보는  쿤밍호수
만수산에서 보는 쿤밍호수 ⓒ 김형태
인공호수의 규모에 놀라면서 동시에 권력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쿤밍 호와 만수산은 증명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 호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없는 백성들이 죽어갔을까를 생각하니 좋은 눈빛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2시 30분쯤에 한의원에 도착했다. 장족(티베트) 지역에서 나는 좋은 약재만을 쓰고 대학에서 운영한다는 곳인데, 대형빌딩의 종합병원 같은 느낌이었다. 한 작은 강의실에서 조금 기다리노라니 6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가이드가 말한 그 유명하다는 최 교수였다. 고향이 강원도라는 최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강의를 하였다.

건강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유익하다 싶었다. 중국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마치 우리 한국 한의학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것 같았다. 강의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의사 2명이 조선족으로 보이는 통역원 아가씨들을 동반하고 들어와 일행 모두를 진맥하고 약을 권했다. 나에게는 위와 장이 약하다며 5호 약을 권했다.(3달에 30만원 정도) 나는 한국에서 식이요법을 하고 약을 먹는 등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동행한 최 선생님께는 간이 나쁘고 폐에 열이 있다면서 3개월 동안 3호 약을 복용하라고 권했는데 한 달 11만 7천원씩 35만원이라고 했다.

일행 중 정 선생님 부부가 약을 샀다. 진맥을 기다리는 동안 마사지를 받으라고 했는데, 안마였다. 2천원을 내고 안마를 받는데 나를 빼놓고는 일행 모두가 받았다. 최 선생님 말에 의하면 책에서 보고 사모님께서 해주던 안마와 비슷했다고 했다. 다만 얼굴 관자놀이 부분과 견정혈 부분에 강하고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특이했단다. 마사지 정도야 받아도 괜찮겠지만 약을 사는 것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약값이 결코 저렴하지도 않을 뿐더러 정말 중국 정부가 인정하고 티베트 대학에서 운영하는 한의원인가도 의심이 갔다.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북경공항에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원래 18시 40분 비행기를 타고 연길에 가기로 했는데 17시 10분 비행기로 앞당겨져 도착하자마자 비행기에 착석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륙하나보다 해서 좋아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출발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자리가 덜 차서 사람을 기다린다고 했다. 시골 버스도 아니고, 세상에 비행기가? 중국은 교통문화와 시간관념에 관한 한 후진성을 면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30분 정도의 코리안 타임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듣자니 2시간도 좋고 3시간도 좋단다. 비행기는 결국 18시 20분에 출발했다.

원래의 이륙 시간과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바람에 괜히 북경공항을 쇼핑할 시간만 날려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연길에 도착해서 안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한 아주머니 말씀이 자기들은 아침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대련인가를 거쳐 연길에 왔는데 저녁 무렵에야 도착했단다. 온종일 비행기 기다리고 타는 시간으로 다 보낸 것이다.

일기가 불순해서인지, 국내선이라 비행기가 작아서인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중국식으로 나오는 기내식을 먹고 집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연길공항이다.

연길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어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국 땅에서 한글을 보다니! 더군다나 한자보다 한글을 우선시하여 먼저 쓰거나 위에 쓰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라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북경에 비하면 사람들의 표정도 살아 있었다.

수화물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장춘발 짐 캐리어에서 우리 짐이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안내방송 하나 없고, 그런 것이 당연시되는 중국이었다. 여행객을 배려하는 문화가 아쉬웠다.

잠깐 화장실에 들렀는데 소변기에 사람이 많아 대변실에 들어갔더니 칸막이가 특이했다. 아랫부분과 윗부분이 잘린 형국이다. 만약에 앉아서 큰일을 본다면 옆 칸에서 볼 일을 보는 사람의 얼굴은 안보이겠지만 다리나 엉덩이는 보일 것 같고, 일어서면 옆에 앉아서 볼일 보는 사람의 모습이 다 보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 다녀온 여자 분들이 밑 부분이 없어서 옆 사람 아랫부분이 다 보인다고 질색하는 것이었다. 중국식 화장실 문화가 공항까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나마 칸막이가 있는 것은 외국인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원래 중국 전통식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으니까. 이왕 배려하는 김에 제대로 칸막이를 할 것이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생각할수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연길 안내를 맡은 현지 가이드와 운전기사가 공항까지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오양은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22살의 조선족 여성이었다. 청순하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에 부끄러움과 동시에 웃음도 많은 아가씨였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과 해맑은 표정에서 마치 산골소녀를 보는 것 같은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오양은 북한 가요 '반갑습네다'까지 부르며 연거푸 반갑다는 말과 함께 중국과 연변에 대해 청산유수로 소개하며 분위기를 생기 있게 만들었다.

연길의 날씨는 북경보다 훨씬 시원했다. 좀 전까지 비가 왔는데 우리가 도착할 무렵 멈췄단다. 날씨에 관한 한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날씨 때문에 여행에 차질을 빚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개빛 하늘에서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빛, 짜증날 정도로 후텁지근한 습도, 거기에 스모그가 낀 것처럼 우중충한 북경에 있다가 연길에 와서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고 맑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바닷가에 온 것처럼 가슴도 탁 트이고 덩달아 기분까지 좋아졌다.

우리는 먼저 저녁식사를 위해 한 식당으로 갔다. 가면서 거리를 보니 정말 꼭 6,70년대 우리나라의 어느 거리를 지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우리는 결혼등록소가 있는 건물에서 내렸다. 1층을 식당으로 쓰고 있었다. 혼인신고소와 식당이 한 건물 안에 있다니 참으로 생소하게 여겨졌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보다 더 한국적인 김치와 두부 등 차려진 음식물을 보면서 여기가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인심도 좋아 말만하면 얼마든지 더 갖다 주는 것이었다. 북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오면서 보니까 그 건물에는 노래방도 있었는데 중국의 노래방은 우리나라의 단란주점과 비슷해서 아가씨가 나오고 술을 먹으며 노래하는 곳이라고 했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 돈 650원에 기본 안주와 술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우리나라 돈 10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초창기에 이곳을 다녀간 한국인 관광객들이 길을 잘못 들여도 단단히 잘못 들인 것이다. 괜히 와서 돈 자랑하고 순진한 조선족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더러는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안겨주고…. 그리하여 이곳 조선족 일부는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고 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란다. 따라서 밤거리를 혼자 나다니지 말라고 가이드는 신신당부하였다.

숙소인 상무대술집은 4성급 호텔이라는데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묵은 호텔 중 최고급이었다. 이 호텔은 우리 일행의 연변지역 관광을 맡은 '연변상우국제관광유한책임공사'의 본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지은 지 1년밖에 안되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호텔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보이가 카트를 끌고 와 짐을 싣고 방까지 안내하는 것도 호텔다웠다. 그런데 우리가 팁 천원을 주니까 별로 고맙다는 표정이 아니다. 다른 일행에게는 아주 노골적으로 2천원을 요구하더란다. 계산을 전제로 한 친절과 팁 문화는 달갑지 않았다.

중국의 호텔 이름은 술집이나 주점(酒店) 등이 많은데, 이것은 전부터 대륙의 손님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업소들이 시대의 발전에 따라 현대식 건물을 짓고 호텔로 바뀐 때문인 듯하다. 외래 용어인 호텔보다 '주점'이란 용어를 쓰는 그들의 주체성은 높이 사주고 싶다. 그 주점을 다시 한글로 술집이라고 당당히 내거는 조선족에게는 더 더욱 존경심이 일었다.

연변의 밤은 생각보다 밝았다. 밤에 보아도 도시에 생동감이 일었다. 가로등의 모양도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씻은 후, 다시 한 방에 모여 다과회를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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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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