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최근에는 예쁜 삽화가 그려진 윤동주의 시집이 많이 나왔다
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최근에는 예쁜 삽화가 그려진 윤동주의 시집이 많이 나왔다 ⓒ 꿈소담이
초등학교 때까지 접해왔던 동시들의 유치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표현과 내용들. 그 새로운 언어 표현과 깊이에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약간의 놀람과 동경을 지녔던 것 같다.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 있는 시적 표현들에 푸욱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특히 내가 감동 깊게 읽고 또 읽었던 작품은 바로 <서시>와 <별 헤는 밤>이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릴 정도로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작품들이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시들이었다. 특히 '별', '하늘'과 같은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들이 아닌가.

<서시>의 경우 길이도 짧고 내용 또한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자기반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어린 나의 마음에도 가슴 찡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당시 유행하던 조그만 종이에 코팅을 입혀 친구들에게 책갈피로 쓰라고 선물까지 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시 <서시>의 전문


이 짧은 한편의 시를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왜 그리 감동적으로 느꼈을까? 그것은 아마도 10대 소녀들만이 지니고 있는 감수성과 잘 부합되는 시상(詩想)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철이 들어가면서, 나는 이 시의 화자처럼 '삶이란 괴로운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적 화자. 그의 괴로운 마음은 곧 나의 복잡한 마음과도 같았다. '아, 사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늘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라는 충격과 혼란 속에 1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 또한 시인처럼 비록 삶이 괴롭고 힘들지만, '나에게 주어진 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별 헤는 밤>만 해도 그렇다. 하나하나 별을 세면서 그 속에서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과 존경하는 시인의 이름을 불러 보는 시 속 화자의 독백.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 또한 별을 헤면서 그 속에 그리운 이름들을 새겨 넣는 낭만을 꿈꾸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시 <별 헤는 밤> 중에서


특히 이 시는 당시에 많은 여학생들이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방송의 제목과 연관되어 더 짜릿한 감동을 주곤 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엄마 몰래 라디오를 켜 놓고 시집을 읽는 기분이란, 요즘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옛날 얘기가 아닐까 싶다.

책 <보리피리> - 한하운의 시에는 슬픔이 묻어 난다
책 <보리피리> - 한하운의 시에는 슬픔이 묻어 난다 ⓒ 미래사
세상의 아픔들에 대해 알게 된 한하운의 시집

사춘기의 나에게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시집은 바로 한하운의 <보리피리>이다. 이른바 문둥이라고 불리는 한센 병 환자였던 시인. 옛날에는 한센 병이 심각한 불치병에다 전염력이 강한 것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었다. 현재도 소록도 등지에 한센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삶을 유지하고 있다.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는 이 병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고독한 목소리가 녹아 들어간 시들이 많다. 특히 이 시집에 있었던 시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은 한센 병 환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서글프고 가슴 아픈 것인가를 극명히 보여 준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문둥이의 삶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닳아 없어지지 않는 문둥이의 고통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의 전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뿐인 문둥이의 삶'이라는 표현 속에 한센 병 환자가 겪는 힘든 고통과 병마와의 싸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절름거리며 걷다보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는 표현들은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쓸 수 없는 표현이 아닌가.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열 다섯 살 소녀였던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서 아프고 힘들게 사는 이들이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이야 다행스럽게도 봉사활동이다 뭐다 해서 학창 시절에 아이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가족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지내던 나의 학창 시절. 그 시절에 만나게 된 한하운의 시들은 숨어 있는 고통받는 자들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통로였다. 그 시들을 통해 나는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세상을 향해 눈을 떠가는 사춘기 시절. 그 시절에 만나게 된 책들은 현재의 내 사고를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유년기의 동화책과 과학백과가 공주와 과학자라는 꿈을 꾸게 만들었던 것처럼.

윤동주와 한하운, 이 두 시인들의 언어들은 사춘기의 감수성을 촉촉이 적셔 주었고 또한 세상의 고통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비록 이 두 시인들의 시집이 현재 인기가 있고 많은 이들이 찾는 것들은 아니지만 나는 이들의 책을 선뜻 권하고 싶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일들로 감동을 받는 순간과 아주 작은 언어 표현으로 눈물이 쏟아지는 날들이 항상 존재하기에….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기념 증보판

윤동주 지음, 소와다리(201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