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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전흥법사부도의 모습, 이런 불교 유물들이 궁궐과 무슨 관련이 있나?
경복궁에 있는 전흥법사부도의 모습, 이런 불교 유물들이 궁궐과 무슨 관련이 있나? ⓒ 신병철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으뜸 궁궐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 기간에 경복궁을 엄청나게 훼손시켰다. 주요 전각들을 헐고 산업박람회를 열기도 하고,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외부에서 경복궁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숭유억불을 표방한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 전국 각지에 있던 뛰어난 불교 조형물들을 옮겨놓아 조선 왕조의 정체성조차 왜곡시켰다. 지금 국립박물관 주변 잔디밭 안에 세워져 있는 승탑, 불상, 탑비, 석등 등이 이런 유물들에 해당한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봉인사 사리탑과 사리장엄구의 모습
광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봉인사 사리탑과 사리장엄구의 모습 ⓒ 신병철
그런데 이런 조형물들 중에서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다. 경복궁 광화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가 그것이다. 원래 이 조형물은 경기도 남양주시 봉인사 부도암에 있었다고 한다. 1620년 광해군 때 세자의 수복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 왕실의 발원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 어느 때 일본으로 불법 반출해서 오사카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소유자인 이와다센소라는 일본인이 자발적으로 우리나라에 기증하여 1987년에 반환한 것이라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봉인사 사리탑의 자세한 모습, 조선 중기 부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봉인사 사리탑의 자세한 모습, 조선 중기 부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신병철
1987년이라면 바로 6월 항쟁과 7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고 그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다. 이 시기에 반환된 석조 불교 유물이 왜 광화문을 들어서면 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을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지 않아서 지금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이후 지금 이 유물은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유물이 이 자리에 위치하는데 무슨 사연이 혹시 있었을까? 반환기증자의 요구였을까? 잘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유물은 당장 철거되어 원래의 자리 경기도 남양주시 봉인사 부도암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세워져 있는 모조물과 대체되어야 한다.

이 사실에 큰 관심없이 경복궁을 찾은 사람은 조선의 궁궐에 원래 이러한 불교 유물을 건립한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궁궐의 정체성에 대단한 혼란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그르칠 수 있다. 유물이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함은 그 자리만이 원래 세운 사람들의 의지와 필요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봉인사 사리탑의 탑신, 용의 생생한 모습이 보인다.
봉인사 사리탑의 탑신, 용의 생생한 모습이 보인다. ⓒ 신병철
유물이 제자리에 있지 못해서 생겨나는 현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정원 특히 조선시대 정원에는 불상이나 석탑을 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경복궁에 석탑이 세워지면서 돈 많고 한심한 부자들이 자신의 넓은 정원에 석탑이나 승탑같은 조형물을 세워 장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탑과 승탑이 부처와 승려의 무덤임을 알면 자신의 정원에 세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1987년은 해방된 지 무려 42년이 지난 때이다. 식민지 시기 일제가 저지른 문화재 파괴와 왜곡을 비판하고 고치는 작업이 완료되어 있어도 모자라는 이 시기에 일제와 똑같은 왜곡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한심하고 또 한심한 일이다. 새로운 불교 문화재를 옮겨 세운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처사다. 당시 문화재청의 한심한 작태에 분노마저 든다.

봉인사 사리탑의 안내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승탑과 같다고 서술하고 있다.
봉인사 사리탑의 안내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승탑과 같다고 서술하고 있다. ⓒ 신병철
뿐만 아니다. 안내판에 소개하고 있는 글도 의문투성이다. 광해군 때 왕세자의 수복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 사리탑을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다. 사리탑은 원래 승려가 죽은 뒤 화장하고 난 사리를 모시는 석조물로 어느 승려의 무덤이다. 왕실이 경비를 대서 만들기는 했지만,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무덤의 주인에 대한 서술이어야 할 것이다. 사리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문제가 많다.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통일 신라 때 팔각원당형은 대단히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단과 탑신과 상륜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신라 하대의 조형술을 대표하고 있다. 이런 것이 고려 시대 변화를 거듭하다가 말기에 이 사리탑과 같은 모양으로 변화되었다. 포천에 있는 무학대사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회암사지 부도(승탑)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대공탑, 통일신라시대 팔각원당형을 대표하는 승탑이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대공탑, 통일신라시대 팔각원당형을 대표하는 승탑이다. ⓒ 웅진 국보의 도판
조선시대에는 불교조형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식어버린 시대라 할 수 있다. 승탑의 규모도 세련미도 떨어져 대부분 조잡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경복궁에 있는 이 봉인사 사리탑과 장엄구는 고려 말기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유물로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문제 있는 서술이라 생각한다.

경복궁에 있는 원주 부론면의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 원래 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경복궁에 있는 원주 부론면의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 원래 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신병철
경복궁 광화문을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봉인사 사리탑과 사리장엄구는 당장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 아울러 경복궁에 산재해 있는 불교 문화재들 중에서 남한에 있으면서 그 자리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문화재도 빠른 시간 안에 제자리를 찾아주자.

원래의 자리가 북한지역이어서 돌아갈 수 없는 문화재와 남한에 있더라도 그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문화재는 박물관이 지어지면 그 주위로 옮겨야 할 것이다.

문화재청 “봉인사 사리탑은 중앙박물관에서 관리…용산박물관으로 이전할 수도”

경복궁에 있는 봉인사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에 대하여 문화재청 건조물과에 몇 가지 문의를 해 보았다. 1987년에 일본으로부터 반환되면서 왜 경복궁에 자리 잡았는지에 대해 담장자는 “특별한 이유는 없으며, 아마도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이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상 그 곳에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며 “반환되는 문화재 중에는 원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 적당한 곳에 세우게 되는데 그 때에는 그 문화재를 관리하는 부처에서 정한다”고 밝혀다.

그는 이어 “봉인사 사리탑은 아마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곳에 세운 것으로 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이 10월 17일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이런 문화재들도 이전할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결국 1987년에 반환될 때, 특별한 생각 없이 박물관이 있는 경복궁에 세운 것이라 판단된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지 않고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을 당시에 이 봉인사 사리탑은 제법 어울렸을지 모르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린 지금은 혼자 덩그렇게 광화문 뜰에 서 있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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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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