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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두 아들이 깨를 털고 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깨를 털고 있다 ⓒ 김교진
들깨를 쌓은 후 도리깨로 사정없이 "탁탁" 두드려대니 들깨에서 향긋한 냄새가 솔솔 난다. 잎뿐만이 아니라 씨앗에도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나는 들깨의 씨앗방에서 나오는 냄새가 좋아 들깨를 거둔 후에도 씨앗을 빼지 않고 집안에 놔두기도 한다. 그리고는 가끔씩 들깨뭉치를 흔들어 들깨의 고소한 냄새를 맡는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깨를 털고 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깨를 털고 있다 ⓒ 김교진
밭주인과 두 아들이 깨를 털고 그 옆에는 손녀가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밭주인에게 "아저씨, 오늘은 깨를 거두시네요?"하고 말을 붙였다. 그는 "어, 오늘 아들들이 와서 아침에는 호박 따고 고추 따서 말렸고 오후에는 들깨 털이를 하고 있어. 이것도 농사라고 혼자서는 다 못해. 사람들 있을 때 해야지"라고 말했다.

고층 아파트와 농부
고층 아파트와 농부 ⓒ 김교진
도리깨는 노가리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도리깨는 노가리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 김교진
농부는 능숙하게 도리깨질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사는 아들은 많이 해보지 않은 듯 도리깨질이 서툴렀다. "도리깨질은 박자가 중요해. 내가 한번 치고 나면 바로 니가 내리쳐. 부딪치지 않게. 이것도 박자가 딱딱 맞아야 하는 거야"라며 밭주인은 아들에게 도리깨질을 가르친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 둘씩 모여든다. 그 중에서 우리 옆집에 사는 청년은 "아저씨, 막걸리 받아 놓으셨어요? 시원하게 한잔 하고 일하셔야지요?"라며 막걸리부터 찾는다. "아, 막걸리는 일 끝내고 마셔야지. 이따가 우리 집에 와서 한잔 하세"라며 집주인은 도리깨질을 하면서 대답한다.

"그런데 이거 홍두깨지요? 홍두깨로 두들기니 소리가 좋네요."
"아, 이 사람아 이건 홍두깨가 아니라 도리깨라는 것이야. 도리깨."
"도리깨질 안 해 봤어? 홍두깨는 다듬이질 할 때 쓰는 방망이가 홍두깨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도리깨와 홍두깨를 구분 못한 이 청년의 말에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도리깨질을 하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도 도리깨질을 하고 있다. ⓒ 김교진
"이 도리깨 직접 만드신 겁니까?"
"그럼 내가 산에 가서 노가리 나무 구해다가 만든 것이지. 어려서부터 도리깨질 했고 여러 개 만들었는데, 뭐. 그거 만드는 건 일도 아냐."
"노가리 나무가 어떤 나무에요?"
"노가리가 노가리 나무지 뭐야. 우리네는 노가리 나무라고 그래. 다른 이름은 몰라."

노가리 나무로 만든 도리깨의 회전 부위는 삼지창처럼 끝을 뾰족하게 깎아 노끈과 두꺼운 고무로 본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도리깨질이 보기에는 쉬운 것 같아도 몇 번 휘두르면 힘이 든다. 그러나 앞사람과 박자를 맞춰서 탁탁 치다 보면 신이 나서 힘든 것도 잊고 도리깨질을 하게 된다.

들깨 타작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들깨 타작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 김교진
들깨 터는 일은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들깨를 베어 눕혀 도리깨질을 한 후에 깻단을 치우고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이며 줄기를 빗자루로 쓸어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깨 알맹이만 걸러 내기 위해서 체질을 해야 한다.

'바쁠 때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옛말이 있듯이 할아버지가 깨 터는 모습을 보고 있던 손녀에게 빗자루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네"하고 달려간 5살짜리 손녀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빗자루를 가져온다.

손녀가 빗자루를 가져오자 밭주인과 친구들은 "고놈, 개보다 낫다" "그러게 말이야 이제 좀 컸다고 심부름도 하고 개보다 낫네"라며 기특해 한다.

주현이가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깨를 터는 모습을 보고 있다
주현이가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깨를 터는 모습을 보고 있다 ⓒ 김교진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서 울려 퍼지는 도리깨 소리가 참 정겹다. 오랜만에 농촌에 사는 기분이 난다. 사실 내가 사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는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애매한 곳이다. 예전에는 농촌이었지만 지금은 외지 사람들이 들어 와 농사짓는 사람이 별로 없다.

주변에는 아파트와 빌라,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고층 아파트를 앞에 두고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썩 맞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밭이 아니면 우리 동네는 완전히 시멘트 지대가 되기에 나는 이밭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밭주인도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계속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인데 여기 떠나서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살 수 있겠어? 서울 가서 살아 봐야 좁은 아파트 안에서 하루 종일 뭐하겠어? 자식들 다 컸겠다 여기서 계속 농사 지으면서 살아야지. 나는 쌀하고 고기만 사서 먹으면 돼. 고추, 배추,무, 가지, 웬만한 채소는 다 내가 키워서 먹잖아. 집 장사들이 내 밭에다가 집 지어서 팔자고 하는데 내 집 있는데 뭐 하러 집을 또 지어? 여기 땅값이 비싸니까 집 지어서 팔면 돈이야 되겠지만 밭이 없으면 우리 부부는 심심해서 못살아. 그리고 내 먹을 것은 내가 키워서 먹어야지 안전하지."

어떻게든 밭을 지키겠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가 나에게는 고마울 뿐이다. 이 밭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밭이 없어진다면 나도 이 동네에서 계속 살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집앞에 텃밭을 빌릴 수 있는 다른 동네에 가서 살려고 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 김교진
깨 터는 일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동네 사람과 이집 아들 등 사람들과 한마디씩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마을 공동의 일이 없어진 요즘은 시골이긴 해도 옆에 누가 사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깨가 얼마나 나오런지 물어 보았다.

"글쎄, 올해는 깨 농사가 잘 돼서 이거 한 일곱 말은 나오겠네. 작년에는 겨우 다섯 말 정도 나왔는데. 우리 식구 일년 먹을 꺼니까 다섯말 정도만 나오면 돼. 이거 음식 만들 때 통째로 쓰기도 하지만 기름 짜서 먹으려고. 요새 기름은 중국산이 대부분이고 국산은 비싸."

부부가 들깨를 체로 거르고 있다.
부부가 들깨를 체로 거르고 있다. ⓒ 김교진
이제 부부가 체를 써서 깨 알맹이를 걸러냈다. 쪼그리고 앉아서 체질을 해서 찌꺼기는 걸러 내고 들깨 알맹이는 그릇에 담아 놓는다. 누군가가 선풍기를 써서 껍데기를 날려 버리면 일이 빨리 끝나지 않겠느냐며 훈수를 두지만 부부는 사양하며 힘든 체질을 계속한다. 700평 밭에 농사를 짓는다는 이 부부는 마음은 정말 부자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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