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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식당에서 끓여주며 인기를 끌던 '장칼국수'를 지금은 내 식당에서 내 손으로 끓여내니 그게 어디냐고 하시지만, 요즘은 하루 2~3그릇 팔기가 고작이시라는데 재미가 나실 것 같진 않다. 내 집에서 세 안나가고 장사하니 그럭저럭이라 하시며 "내 집"임을 강조하신다.
남의 식당에서 끓여주며 인기를 끌던 '장칼국수'를 지금은 내 식당에서 내 손으로 끓여내니 그게 어디냐고 하시지만, 요즘은 하루 2~3그릇 팔기가 고작이시라는데 재미가 나실 것 같진 않다. 내 집에서 세 안나가고 장사하니 그럭저럭이라 하시며 "내 집"임을 강조하신다. ⓒ 곽교신
필자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이 내가 전생에 개(犬)였을 거라고 한다. 개 짖는 소리를 개처럼 잘 내고, 표정이 가끔 개 같으며, 경계심이 유난히 많은 개들도 내겐 주저없이 잘 따르는 게 무엇보다 유력한 증거란다. 즉, 개와 '코드가 맞다'는 얘기다.

그렇게 '견적(犬的)'인 필자에게 '인간적'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를 잔잔히 가르쳐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는 게 이번 나들이다. 필자는 개라도 되지만, 간혹 개만도 못하단 소리를 듣고 사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 이 여행을 같이 나누고 싶다. 잔잔한 감동을 찾는다는 것은 여행을 떠날 핑계고, 그 여자가 끓이는 '장칼국수'를 먹으러 가는 게 솔직한 심정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독자들의 기억이 가물가물할 이 여행의 씨앗이 되는 사건을 다시 새겨본다.

79년 3월 16일 약초 캐러 산에 올랐다가 담배꽁초로 산불을 내서 강원도 홍천군 삼마치리 국유림 잣나무 1만여 그루를 태운 남편에게 징역 6월과 산림피해 변상금 123만157원을 납부하라는 통지가 떨어졌다. 식당 허드렛일 일당이 6000원인 시절, 하루하루가 근근한 촌살림에 123만157원은 현기증 나는 액수였다.

설상가상 징역을 치른 정신적 충격에 남편이 중풍을 맞더니 1984년 세상을 떴다. 남편(이두봉·당시 63세·홍천군 희망리)은 유언처럼 "자식들에게 누가 되니 힘들더라도 내 대신 변상금을 꼭 다 갚아달라"고 그녀(용간난·당시 48세)에게 당부하고 눈을 감았다. 네 자식을 키울 일과 남은 변상금 70여만원이 고스란히 여자 몫이 되었다. 부칠 땅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던 그녀는 남의 식당에 나가 품을 팔아 네 자녀와 먹고 살며 무려 20년에 걸쳐 그 70만원을 다 갚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당사자 사망 사유로 납부의무가 자연 소멸된 변상금이었다.


어떤 공무원과의 긴 인연

산불이 났을 당시 홍천군을 관할하는 북부지방산림청 말단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타 근무지를 돌다가 과장으로 승진해 홍천군에 다시 돌아온 한 공무원이, 자신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산불사건이며 더구나 당사자가 사망했는데 1년에 한 두번 씩 푼돈으로 산불피해변상금을 꾸준히 갚고 있는 그녀를 서류정리 중에 우연히 발견하곤 놀란다. 그 뒤로 한 두번 더 갚는 것을 지켜보다가 2001년 9월 18일 마지막 남은 작은 돈을 자신이 대신 납부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 "변상금을 다 냈으니 이젠 마음의 짐을 풀어버리시라"고 말했고 한 지방 신문사에 아름다운 이 얘기를 알렸다.

2001년 9월 29일 지방지 보도를 시작으로 저녁 9시 TV 뉴스는 물론 거의 모든 언론이 한 번씩은 이 사연을 보도해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것을 비롯해서 개업 후에는 식당까지 찾아온 정치권 실력자들의 방문을 몸살 나게 겪어냈던 그녀(나는 이 기사에서라도 그 할머니를 더 늙으시기 전에 꼭 '그녀'라 불러드리고 싶다).

벽에 방문소감을 쓰기도 하지만, '등록회원 의견쓰기'쯤으로 볼 수 있는 자기 명함에 방문소감 남기기. 필자도 전에 꽂아두었다.
벽에 방문소감을 쓰기도 하지만, '등록회원 의견쓰기'쯤으로 볼 수 있는 자기 명함에 방문소감 남기기. 필자도 전에 꽂아두었다. ⓒ 곽교신
산림청은 그녀가 오랜 세월동안 변상금을 잊지 않고 성실히 납부한 감사의 사례로 납부한 전액을 성금 형식으로 정중히 돌려주었으며 전국에서 성금으로 답지한 돈까지 합하니 600여만원. 그 돈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몇 억이 보통명사로 돌아다니는 혼탁한 세상에 꽃처럼 핀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해 국민이 보낸 감사와 애정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렇게 모인 돈을 공사비로 해서 식당을 내고자 살림집 한쪽 벽을 털어냈다. 공사 때는 동네사람들이 내 일처럼 기쁘게 일손을 모았다. 변상금을 못 갚으면 집을 차압해야한다는 말에 "푼돈으로라도 나눠 내며 죽기 살기로 지켰던" 남편의 유일한 유산인 눈물겨운 집이 식당으로 바뀌는 감격적인 공사였다. 그녀의 평생 소원이던 '내 식당'의 간판은 '용할머니 칼국수'. 결국 그의 남편은 20년 세월 동안 70만원을 갚은 그녀에게 하늘에서나마 식당을 선물한 셈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요즘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냐고 그녀에게 물으니, 주저없이 "절대로 안 갚겠죠"한다. 당자가 죽었으니 변상금을 갚지 않아도 되는데 그건 몰랐냐고 묻자, 알기는 알았다며 말을 흐리더니 너무 살기 어려워 관에 하소연도 해보긴 했단다. 필자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돈이 국가에 낼 변상금이라는 의무감보다는 어떻게든 지켜야 할 죽은 남편과의 약속이었다는 자의식이 더 강했다는 것을 필자는 뚜렷이 느꼈다.

남편과 유달리 정분이 좋았다는 소문을 들었노라고 분위기를 바꿔가며 같이 살던 시절 얘기 좀 들려달라고 졸랐으나 그저 소녀처럼 부끄럽게 웃기만 할 뿐 남편 얘기는 사양한다. 간직하고 싶은 남의 얘기를 집요하게 묻는 것도 말로 짓는 큰 죄다. 그녀의 미소에 담긴 뜻을 헤아리며, 안방 얘기를 세상에 함부로 내놓기 싫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상자 깊이 넣어두고 가끔 혼자만 꺼내보는 보석도 있는 것처럼 때론 혼자만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보석인 얘기가 있는 법이다.

오랜 세월 지긋지긋하던 남의 식당 일이 한이 되어 내 집에서 내 손으로 끓여내고 싶어 차린 '용할머니 칼국수'가 칼국수집의 현주소인 '희망리'처럼 계속 그녀의 희망인지, 아니면 갑자기 찾아와 사진 찍고 난리치며 냄비처럼 끓다가 잊고 마는 세상에 괜히 차린 칼국수집인지 필자는 모르겠다. 힘들지만 월세는 안 나가니 한 그릇 두 그릇 팔리는 대로 일삼아 가게를 연다는 욕심기라고는 한 톨도 없는 그녀의 웃음이지만 미소가 가볍지는 않았다.

내가 서너달에 한 번은 '장칼국수'를 먹으러 그녀를 찾아가는 것은, 칼국수는 순전히 핑계고 늘 욕심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세상에 시달려 예리해져가는 나의 거친 심성을 갈아내기 위해서다. 나는 차로 이 삼십 분 거리로 홍천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거의 그녀의 가게에 들른다. 아름다운 그녀가 지키고 있는 홍천이 좋다.

아름다우신 할머니께.

희망리의 용할머니 칼국수집은 우리에게 계속 희망일까?
희망리의 용할머니 칼국수집은 우리에게 계속 희망일까? ⓒ 곽교신
할머니,
그냥 할머니가 좋아서 가끔 뵙다가, 이번엔 기사를 쓴답시고 지나간 얘기를 새삼 들추면서 제가 다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전보다 많이 야위셨던데, 건강하세요.
그래야 손수 담그신 된장을 풀어 끓여내시는 구수한 장칼국수를 오래오래 내주실 수 있고, 그거 먹으면서 "나더러 꼭 갚으라고 하고 갔으니 그걸 어떡해유" 하신 말씀의 소박하고 귀한 뜻을 더 오래 기억하고, 이 세상을 똑바로 사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지를 사람들이 스스로 묻고 또 묻지요.

저를 믿고 어려운 얘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못 들은 척 해야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알만큼 저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몸보다 마음이 힘드셨던 얘기들은 저도 가슴에 묻겠습니다. 그래도 하소연이라도 하시니 속은 시원하시지요?

할머니의 얘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갖는다는 걸 잊지마세요.

온 세상에 대고 엄청나게 큰 일을 하신 거예요, 할머니.

건강하세요.
아주 추워지기 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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