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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이나 경계구조물이 없는 윤증 고택 사랑채와 넓은 마당
담장이나 경계구조물이 없는 윤증 고택 사랑채와 넓은 마당 ⓒ 임성식
높고 푸른 가을하늘 밑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논산 노성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약 1km 떨어진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윤증(1629~1714·조선 중기의 문신·호는 명재)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윤증 고택 앞에서 수백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넉넉한 마음으로 담장 없는 넓은 사랑채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진입로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진입로 ⓒ 임성식
남녀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윤증 고택은 크게 남성들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등 3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증 고택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자락에 자리잡고 있고, 좋은 집터의 조건인 배산임수를 따르고 있다. 노성산 밑으로 둥그런 모양의 옥녀봉이라는 산을 배경으로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또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고택 앞 남쪽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작은 언덕이 안산(安山)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조성하여 전체적으로 운치를 더하고 있다.

윤증 고택은 각종 유명잡지나 언론에 많이 소개되었다. 그 유명세는 단순히 오래된 집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비정신과 실용성 엿볼 수 있어

사랑방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고택 인근 향교에 오고가는 유림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으리라.

먼저 밖에서 보면 특이하게 담장이나 경계물이 없는 구조가 눈에 띈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안채만 보호했고 사랑채는 과감히 일반에 공개돼 있다. 두려움 없고 자신감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윤증 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강요된 위세가 아니라 윤증이 평소 추구했던 향촌민의 교화와 보살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카리스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채 내부에 미닫이 여닫이 겸용문은 실용성과 기능성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내부에 미닫이 여닫이 겸용문은 실용성과 기능성을 갖추고 있다. ⓒ 임성식
윤증은 조정에서 20여 차례나 벼슬자리를 준다고 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보통은 몇 차례 사양하다가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의정 자리까지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정도였다고 한다.

왕명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시대에 윤증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항명이다. 임금이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윤증 주변을 감시하였으나 티끌만큼 꼬투리 잡힐 일이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평소 식사도 보리밥에, 반찬으로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만 먹는 때도 많았다. 인근 관리들이 인사드리러 찾아와 식사하는 경우에는 꽁보리밥과 볶은 소금을 명재와 같이 먹어야만 하였다.

맛있는 반찬에 길들여진 관리들은 거친 음식이 안 넘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동구 밖 느티나무쯤을 지날 때면 모두 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재야에서 윤증은 상소와 편지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재야에서 윤증은 상소와 편지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 임성식
사랑채 아랫목에 뒷방으로 들어가는 샛장지문은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미닫이 여닫이 겸용 문으로, 기능성과 실용성이 돋보인다.

누마루에 앉아 바로 아래를 보면 금강산을 볼 수 있다.(석가산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
누마루에 앉아 바로 아래를 보면 금강산을 볼 수 있다.(석가산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 ⓒ 임성식
누마루에서 밖을 보면 사랑채 앞마당에서 고택을 볼 때와는 달리 훤히 트이고 넓어 보이는 게 특징이다. 누마루에서 바로 앞 처마 밑을 보면 금강산을 옮겨다 놓았다는 석가산이 있어 넉넉한 풍류사상을 읽을 수 있다.

풍수지리상 혈구(穴口)에 해당한다는 맛있는 샘물(이것이 윤증 고택의 장맛을 결정한다고 한다).
풍수지리상 혈구(穴口)에 해당한다는 맛있는 샘물(이것이 윤증 고택의 장맛을 결정한다고 한다). ⓒ 임성식
그 앞에 조성된 샘물에서 물맛을 보면 윤증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맛이 왜 좋은지 알 수 있다.

좌우 창문을 열면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남쪽으로는 대둔산이 보이도록 전체적으로 전망이 확보되어 있고 여름에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스럽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소론파의 거장인 명재 윤증은 사문난적이라 하여 많은 저서는 안 남겼으나 언행록 등이 남아있다.
소론파의 거장인 명재 윤증은 사문난적이라 하여 많은 저서는 안 남겼으나 언행록 등이 남아있다. ⓒ 임성식
동학이나 6·25 같은 난리 속에서도 윤증 고택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주변에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수백년간 명문 집안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재 윤증이 노론의 거장인 송시열에 맞서면서 소론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성에 있다. 그의 도덕적 카리스마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보여준 처신과 무관하지 않다.

명재는 '이(利)'를 따라 행하면 마을 사람들이 원망이 많다 하여 양잠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또한 노성 윤씨 집안은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 방안으로 의전(義田)과 의창(義創)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부의 재분배 방식이다.

봉사손 역할을 하고 있는 명재의 12대 후손 윤완식(49)씨는 "남을 배려하는 가풍은 명재 이후에도 이어져 왔다"고 한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답방객
사랑채 누마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답방객 ⓒ 임성식
"저의 증조부인 윤하중 할아버지가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를 걸쳐 살았던 분이신데, 1939년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를 돕기 위해 노성과 상월에 신작로를 쌓는 공사를 일부러 벌였다고 합니다. 석축을 쌓는데 참여한 마을 사람들에게 노임으로 쌀을 주었습니다."

"생일을 맞이하면 다른 집안들은 생일잔치를 하는데 ,우리 집안은 생일잔치를 생략하고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줬습니다. 이런 전통 때문에 서울에서 시집 온 저의 형수님(차종부 신정숙씨)은 이날까지 생일상을 한 번도 안 받았습니다."

1년 방문객 1만5000명 달해

안채 뒤뜰 장독대에서는 윤증 고택이 자랑하는 고품격의 음식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안채 뒤뜰 장독대에서는 윤증 고택이 자랑하는 고품격의 음식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 임성식
사랑채 앞마당에서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고택 곳곳을 감상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구 달서구에서 가족과 함께 왔다는 정인봉씨는 윤증 고택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주변 풍경이 평화롭고 아늑하고……. 대갓집의 경우는 위엄이 넘쳐 근접하기가 부담스러운데 반해 이 집은 한눈에 들어와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이 들었어요."

종학당은 윤씨 노종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사립교육기관(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위치)
종학당은 윤씨 노종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사립교육기관(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위치) ⓒ 임성식
안채에서는 종부 양창호(85)씨, 차종부 신정숙(59)씨 두 며느리와 윤완식씨가 이날도 오가는 방문객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두 종부님들과 많은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집안의 자랑거리이자 전통 중 하나로 대를 이어 장을 담가 보관하고 있는 뒤뜰 장독대를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윤증 고택을 나섰다.

명재 윤증 선생 소개

▲ 명재 윤증 선생 초상화
윤증[尹拯]

♧ 1629 ~ 1714, 조선 중기의 문신
⊙ 본관 : 파평(坡平)
⊙ 호 : 명재(明齋) ·유봉(酉峯)
⊙ 시호 : 문성(文成)
⊙ 별칭 : 자 자인(子仁)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 《명재유고(明齋遺稿)》

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 ·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고,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 ·이유태(李惟泰)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 윤증고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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