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영국의 만화가 앤디 라일리의 <자살 토끼>
ⓒ 거름
여기, 죽고 싶어 안달 난 토끼가 있다.

하지만 목을 매거나 강물로 다이빙하기, 음독·할복처럼 손쉬운(?) 방법으로는 죽고싶어하지 않는다. 죽음의 미학은 또는 죽음의 고통은 다른 대상을 매개로 할 때, 다른 대상의 시선이 있을 때 배가된다.

그러므로 토끼는 할복하는 사람의 등에 찰싹 붙어 곁다리로 자살하거나, 노처녀에게 멜로 영화를 보여 주어 (아마도) 맞아 죽거나, 남들 다 거수경례할 때 혼자 '비(V)' 자를 그려 보여 (아마도) 총살당하거나, 환영 인사하는 외계인의 급소를 걷어 차 방사선 총에 녹아 죽는 등의 방법을 택한다(참고로 '아마도'라는 표현을 쓴 건 불행인지 다행인지 죽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얌전히 죽는 방법 대신 요란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죽고싶어하는 토끼, 그런 점에서 이 녀석은 결코 한 존재의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죽음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만화들을 넘기면 넘길수록 이 잔혹한 자살 시리즈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노아의 방주를 거부하고 혼자 지구상에 남아 피크닉을 즐기는, 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토끼 녀석이 사실은 나에게 무언가를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웃음은 타인과 나 사이의 모종의 전제가 없다면 발생할 수 없으니, 지금 대사 하나 없는 만화들을 보며 키득거리다 못해 꼬르륵 넘어가고 있는 나와 이 녀석 사이에는 분명 함께 공유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얼까 하고 이 무표정한 토끼 녀석을 노려보니, 알 것 같다. 이 녀석은 ‘진지함’으로 포장된 모든 편견들을 뒤흔들며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피사의 사탑을 보면서 오묘한 수학의 진리와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거창하시긴! 토끼는 피사의 사탑 한 귀퉁이에 폭탄을 설치해 무너진 벽돌에 (아마도) 깔려 죽는다.

▲ <자살 토끼>는 '낯익음'을 비틀어 웃음을 유발한다.
ⓒ 거름
위대한 종교의 힘으로 지구의 종말을 구원해 보겠다는 거야? 이봐, 노아의 방주는 만석이라고! 토끼는 곧 홍수가 날 이 땅에서 피크닉을 즐긴다.

요즘 복고풍을 타고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아바의 음악에 취해 있단 말이지? 토끼는 아바의 레코드판을 문 채로 벽에 헤딩하며, 그것이 최고의 자살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아, 이렇듯 낯익은 것들을 낯선 자살 도구로 바꾸는 토끼의 악랄함이란!

이 토끼가 우국충정의 거북이를 속여먹은 토 선생보다 더 못됐다는 점은, 이 녀석이 궁극적으로 무얼 조롱하고 있느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결국 토끼는 우리가 ‘죽음’이라는 대상에 부여하고 있는 금기, 경외감, 무게 자체에 딴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매개로 고통의 진정성을 증명하려는, 그리고 대개는 우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효력을 발휘하는 그러한 행위의 아우라를 벗겨 내면서, 이 토끼 녀석은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삶을 긍정한다. 못에 찔리고 토스트기에 잘리고 폭탄에 몸이 산산조각 나는 슬랩스틱을 벌이며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들아, 제발 좀 죽지 말라고.

자살토끼 세트 (자살토끼 + 돌아온 자살토끼 + 2011년 달력 포함 한정판)

앤디 라일리 지음, 거름(2010)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청소년 월간 잡지에서 편집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기자로 등록합니다. 제 관심 분야는 주로 문학에 집중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쓸 생각입니다. 딱딱하기보다는 단단한, 쉽고 재미 있으며 삶이 녹아 있는 기사를 쓰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