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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오피아는 20세기말에 전쟁 등으로 수십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 난민 아이들이 국제기구가 운영하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고데 지역의 피딩센터로 가고 있다.(2000년)
이티오피아는 20세기말에 전쟁 등으로 수십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 난민 아이들이 국제기구가 운영하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고데 지역의 피딩센터로 가고 있다.(2000년) ⓒ 성남훈
오랫동안 테러리즘에 시달려 왔음에도 테러리즘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인도 국가인권위 A. S. 아난드 위원장의 발제에 담길 ‘일반 범죄행위’와 ‘테러리즘’의 차이에 대한 구분은 주목할 만하다. 아난드 위원장은 1994년 인도 대법원의 판결문을 인용하며 “테러리즘은 폭력을 사용해 단지 피해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손해를 끼치는 범죄행위가 아닌 장기적인 정신적 피해와 전체 사회에 잠재적인 영향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사람들과 사회에 “공포심을 심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 결과 사람들로부터 무력감과 불안감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사회의 화합과 평화와 안정을 깨뜨린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범죄행위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아난드 위원장은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나라에선 자유투사”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분명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조직적인 인권 침해가 분쟁과 테러리즘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그 결과 20세기 초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사망한 인구 중 민간인의 비율이 5%인데 반해 20세기 말에는 90%에 달하고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이들과 여성들이지만 그렇다고 테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권을 희생시킨다면 이는 “자멸적”이라는 경고다.

유엔개발기구(UNDP)의 2002년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81개의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 중 제대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는 47개국에 불과하다. 많은 나라들이 그 이행기에서 독재와 분쟁 상황으로 퇴보하고 있다. 그 중 한 예가 40년 동안 전쟁선포를 하지 않고도 내란에 시달리고 있는 콜롬비아.

콜롬비아 옴부즈만 페레즈 오르티스 대표는 ‘테러리즘으로 인한 사회·경제·문화적 피해’를 주제로 발표한다. 그는 발제를 통해 △직접적인 군사비용 △인프라의 물적 자산의 파괴 △인명피해의 경제적 가치 △사회적 손상비용 △불법 송금 △공포와 불확실성으로 인한 낭비 △신뢰 등의 무형 자산파괴를 테러리즘으로 인한 비용으로 꼽았다. 즉 모든 무력 분쟁은 부를 파괴하고 결국 인간개발에 소용될 자원이 유출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다.

페레즈 오르티스 대표는 콜롬비아가 무력분쟁으로 인해 겪고 있는 가장 비참한 결과로 이주민을 꼽았다. 1980년 이래로 콜롬비아는 10만 명 이상이 분쟁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200만명 이상이 이주민이 되었고, 100만명이 정치적 폭력으로 야기된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나라를 떠났다.

이주민과 더불어 최대의 희생자는 소수민족, 아이, 여성 등 사회 취약집단. 불법 무장집단들은 원주민(인디오)들의 생명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토, 문화적 자치권, 관습 등을 짓밟고 마약재배와 밀매에 강제 동원했다. 또한 게릴라와 사병조직간의 분쟁에 휘말려 정보원과 조력자로 간주되어 협박당하고 살해당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교육기회의 박탈은 물론 농촌과 도시의 학교들은 무장단체에 접수되어 강의실은 부대의 휴식처나 탄약 저장고로, 운동장은 전투원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지역으로 들어가는 주민들. 도로 근처에 지뢰가 매장돼 있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못해 버스 지붕 위에 올라 앉았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지역으로 들어가는 주민들. 도로 근처에 지뢰가 매장돼 있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못해 버스 지붕 위에 올라 앉았다. ⓒ 성남훈
더욱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벌이는 정부의 ‘대테러 투쟁’은 사회정책보다 군사전략에 우선 투입되며 점점 더 많은 재원의 할당을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페레즈 오르티스 대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천연자원 부족에 시달리는 콜롬비아와 같은 나라로서는 사회·문화·경제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투자의 희생을 가져오며 이러한 예산 삭감의 최대 희생자는 사회 취약계층이라는 점을 밝힌다.

분쟁의 교훈, 여성 등 이중피해자들의 각성

르완다 국가인권위 데오그라시아 카윰바 부위원장은 ‘전쟁’과 ‘강간’이라는 피해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여성의 사례를 제시한다. 카윰바 부위원장은 ‘분쟁에서의 여성권리’라는 발제문을 통해 “1995년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가 분쟁의 상처를 넘어 남녀차별에 대한 르완다의 전사회적 인식과 제도를 제고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고백한다.

그 한 해 전 르완다는 3개월 만에 100만 명,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사람들이 분쟁으로 인해 사망했다. 여성은 인종말살의 ‘무기’로 강간(1만5000명이라는 통계도 있지만 불분명하다)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입었다. 이 같은 충격적인 상황에서 그 이듬해 르완다 정부는 북경 행동강령을 채택, 강령에 명시된 12개 주요 항목을 준수하기 위해 ‘북경 여성대회 행동강령 조사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괄목할 만하다. 1994년 과도정부 수립 후 신설된 ‘여권신장 및 가족부’(한국의 여성부)를 통해 남녀평등 업무를 주관했으며 이외에도 국립여성위원회, 젠더관측소, 인권위원회 등의 국가기관들이 젠더 지수를 관측하고 준수감시, 방향 설정 등의 역할을 해왔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입법 관련 사항. 2003년 개헌과정에서 평등권 등의 기본권이 명시되었으며 혼인제도와 상속에 있어 친정의 재산과 부부의 재산에 대해 여성의 권리를 보장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열의가 높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한 소녀가 미국의 침공 이후 임시로 마련된 학교시설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열의가 높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한 소녀가 미국의 침공 이후 임시로 마련된 학교시설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 성남훈
특히 르완다가 다인종 분쟁을 겪고 있다는 점을 감안, 외국인과의 혈연관계가 발생할 겨우 어머니의 국적을 물려주지 못하게 했던 규정을 철폐하고, 어머니의 국적을 물려줄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정부기관의 여성 고용 비율을 1/3로 명시하고, 의회에도 할당제를 도입, 현재 르완다의 여성 하원의원 비율은 45%, 상원의원은 30%에 달한다.

카윰바 부위원장은 “르완다 인종 학살을 특징짓는 인권 유린은 파벌 분쟁의 결과이고 특히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여성의 권익을 회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행해진 폭력으로 인해 존엄성, 신체적 독립성, 자아 실현 등의 권리가 여전히 짓밟히고 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1994년 인종 학살을 비롯한 르완다 전역의 긴장된 분쟁상태의 지속은 “분쟁 해결에 여성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큰 교훈이라고 밝힌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인권 유보는 “자멸적”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전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에 있어 한국은 한 가지 모범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한국국가인권위의 강명득 인권정책국장은 ‘대테러 조치, 시민 정치적 권리와 법치한국’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강조했다.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9월 28일 채택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1373 결의안’은 회원국들에게 구체적인 대테러 정책을 취할 것을 ‘의무’로 강제했다. 하지만 이 결의안은 회원들에게 대테러 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인권협약 등을 준수할 의무를 두지 않는 등 “대테러 정책의 중요성과 인권 보장 사이의 불균형”이 이뤄져 왔다.

이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를 반영해 200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테러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런 흐름을 반영했다. 새로 발효된 1456결의안은 “각국은 테러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조치들이 국제법에 규정된 의무와 일치되도록 하여야 하며 그런 조치들은 국제법 특히 인권, 난민, 인도주의 관련법들과 조화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임의적 체포, 통신 감청, 외국인 출입국 통제 등 여전히 각국의 대테러 정책 실행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의 강명득 국장은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며 △인권 침해에 대한 감시와 권고 △ 사회문제 해소를 위한 국가 정책 권고 △유엔기구들과 개별 국가 간의 매개체 역할 △‘인권에 기초한 안보체제’ 구축을 위한 국제연대 등을 그 내용으로 꼽았다.

한국의 경우 국가인권위가 국회의 테러방지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테러방지법에 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다시 수정안이 제출되었으나 또다시 반대의견서를 정부와 국회에 제출했다. 국제사회의 인권보호 노력이 국가정책에 반영되도록 한 시도였다.

한국의 국가인권위는 테러방지법 검토의견서를 통해 정부가 대테러 조치에 국제인권법과 유엔 결정 등의 준수를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결과적으로 국회는 국가인권위의 반대의견 표명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테러방지법 제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한국의 이러한 사례는 “국제인권기구와 개별 국가의 중간 매개체로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구조적, 제도적 선결요건은 무엇인가, 또한 이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지”에 관한 국제사회의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분명한 증거’ 없이 ‘국가안보’ 말하지 마라

북아일랜드 인권위 브라이스 딕슨 위원장은 분쟁 상황에서의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강조한다. 북아일랜드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더불어 오랫동안 정치적 테러리즘이 지속돼 온 대표적인 분쟁지역. 영국과 분리·독립을 위한 구교도측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친영국 신교도측 간의 분규로 1960년말 이래 3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테러에 대항하는 법 제정에 있어 북아일랜드 인권위의 경험은 주목할 만하다. 딕슨 위원장은 ‘분쟁상황에서의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 국제기준에 대한 홍보 △ 분쟁이 인권에 위배된다는 사실의 인정 △경찰과 검찰 등 국가기관에 권고 제시 △ 유엔 인권위 등의 국제기구와 언론을 활용한 인권 기준 준수 감시 △ 법정의견서 제출 등 사건소송의 적극적 개입 등을 통해 분쟁을 억제하고 예방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밝힌다. 그런 점에서 테러에 의한 살인이 현재 1년에 10여 건 정도에 그친다는 사실은 이러한 북아일랜드 위원회의 노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면서 딕슨 위원장은 '피해야 할 위험요소'로 “테러 및 여타 형태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한 법은 의회의 면밀한 조사 없이 조급하게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언가를 조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반 대중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에서 제정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조치들이 효과적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법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려 분쟁세력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딕슨 위원장은 “‘국가안보’의 개념을 함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며 “이는 국가의 법정 해명을 피하기 위한 ‘공공이익’이라는 면죄부로 이용되어 왔다”는 점을 든다. 이 밖에도 재판 없이 용의자의 감금을 허용하는 법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분쟁 연루자들을 다루는 특별법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북아일랜드가 법 제정의 경험을 시사한다면 우간다의 경험은 좀더 ‘현장’ 중심적이다. 우간다 인권위 마가렛 세카가 위원장은 분쟁을 조기에 경고하고 가속화를 예방하기 위해 “분쟁지역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다른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 네크워킹을 시도해 왔다”고 증언한다. 쌍방향의 이해충돌로 빚어진 분쟁은 그 해소에서 역시 일방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세카가 위원장은 “인권위는 정부군과 반군 양측이 모두 자행하는 인권 유린을 비난해 왔고, 그들의 무장해제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가 모순된 성명을 발표하고, 비국가 주체들과 협상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등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분쟁의 맥락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시마 사마르 아프가니스탄 독립인권위 위원장이 발제를 맡았다. 또한 ‘분쟁과 테러리즘의 맥락에서 본 이주문제’에 대해서는 마누엘 아길라르 벨다 스페인 옴부즈맨 부대표와 퓨리피카시온 발레라 퀴섬빙 필리핀 인권위 위원장이 발제를 맡는다. 세르지오 페르난도 모랄레스 과테말라 인권위 위원장과, 존본 도우사 호주 인권위 위원장은 ‘분쟁과 대테러, 시민·정치적 권리와 법치’에 대해 발제를 추가한다.

히나 질라니 유엔 인권옹호특별보고관과 비진드미트리제비치 베오그라드 인권센터 소장이 기조 발제를 하는 이번 제7차세계인권기구대회에는 모두 13명이 발제자로 나서 나흘간 뜨거운 토론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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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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