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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너머 짙푸른 바이칼의 풍경
야생화 너머 짙푸른 바이칼의 풍경 ⓒ 최성수

알흔섬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아득해진다. 알흔섬 가는 길에 만난 시베리아 평원과, 그 평원 위로 시리게 펼쳐진 하늘, 때때로 그림자를 초원에 드리우며 흘러가던 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을 넉넉하고 잔잔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르쿠츠크를 떠나 한동안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어 선 곳은 우리나라 솟대 같은 것이 서 있는 작은 공터였다. 우리를 안내하던 스베따는 웃으며 서툰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고 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여행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스베따는 이르쿠츠크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여행사를 직접 차린 사장이다. 우리의 기사는 스베따의 아버지인 빅토르다.

"빅토르 최!"

내가 러시아의 고려인 가수를 떠올리며 소리치자 빅토르는 순진하게 웃었다. 인상이 선한 그는 나와 동갑이란다. 그런데 벌써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를 차렸다니, 빨라도 보통 빠른 게 아니다.

몽골 인종의 시원, 알흔을 찾아가는 길

알흔 가는 길의 부리야트식 고수레를 하는 곳에 서 있는 솟대
알흔 가는 길의 부리야트식 고수레를 하는 곳에 서 있는 솟대 ⓒ 최성수
스베따의 동생과 동생의 애인까지 동행이었는데, 그 네 러시아인은 미리 준비한 빵과 소시지, 술과 음료수를 차려놓고, 하늘과 땅에 음식을 던지면서 기원을 했다. 우리나라의 고수레 풍습과 꼭 같다.

몽골 인종의 시원이라는 알흔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와 똑같은 풍습을 만나니 마음이 한결 푸근해진다.

스베따는 우리에게 헝겊 띠를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공터 옆 버드나무에 매달라고 한다.

"소원을 빌어야 해요. 원래는 자작나무에 매달아야 하지만 없으니 그냥 저 나무에 매달면 돼요."

책에서 본 자아라라는 천이다. 우리가 성황당을 지나가며 돌을 하나 얹어놓고 앞날의 행운을 빌듯이, 이들은 헝겊을 묶으며 소망을 비는 것이다.

바이칼 근처에 사는 원주민인 부리야트족의 풍습이라는 말에 더 호감이 간다. 부리야트족이 누구인가? 부리야트는 우리 몽골리안의 뿌리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부리야트 마을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그래서 이런 풍습을 꼭 지키세요."

스베따가 설명을 한다.

부리야트식 고수레 의식을 마치고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가도가도 아득한 평원, 낮은 구릉과 그 너머로 시린 하늘, 드문드문 나타나는 집은 초원의 일부가 되어 풀숲 사이에 나직하게 앉아 있다.

구릉 저편에 어쩌다 한 그루의 나무가 생뚱맞게 서 있기도 하다. 마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나오는 올리브 나무처럼, 초원에 달랑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세상의 풍파를 혼자 견뎌내야 하는 저 나무의 고독은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야생화 평원 너머에 혼자 선 나무 한 그루. 그 나무의 무한 고독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야생화 평원 너머에 혼자 선 나무 한 그루. 그 나무의 무한 고독이 느껴지는 것 같다. ⓒ 최성수

자세히 보면 초원은 온통 야생화다. 긴 겨울과 짧은 봄을 지나며 생명의 숨결을 길러 올린 야생화들이, 순식간에 지나갈 여름날의 소중한 하루하루를 꽃피우고 씨 날려, 다음해의 생명을 준비하는 모습은 여리면서 장엄하기까지 하다.

푸른 초원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산 주름은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그 평원에는 온통 야생화가 피어 있다. 흰 패랭이, 붉은 패랭이, 엉겅퀴, 오이풀, 구절초, 이질풀 따위들이 서로 섞여 바람에 몸을 눕히고 있다. 온통 시린 초원의 산 주름에 때때로 포즈처럼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군데군데 목책이 쳐져 있고, 목책 안에는 감자꽃이 피어 있다. 목책 밖에는 야생화, 목책 안에는 감자꽃이 피어 시베리아의 여름이 온다. 목초를 거두는 사람의 긴 낫에 번쩍이는 햇빛, 그 햇빛을 받으며 느릿느릿 야생화를 뜯어먹는 소와 말들의 땅.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온통 이기와 탐욕으로 채우던 삶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베리아 평원의 평화는 낯설면서도 곱다. 시베리아 평원에서의 목책은 인간의 영역과 동물의 영역의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목책 안에는 인간이 먹을 감자 따위를 심고, 그 밖의 것은 모두가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의 차지인 셈이니, 그 경계는 탐욕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 이외의 것들에게 주는 무한 자유로움의 경계인 셈이다.

부리야트 샤먼 바렌틴의 신화 이야기

목책 안에는 감자꽃, 밖에는 야생화. 목책 안은 인간의 땅, 밖은 생명 모두의 땅.
목책 안에는 감자꽃, 밖에는 야생화. 목책 안은 인간의 땅, 밖은 생명 모두의 땅. ⓒ 최성수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여덟 시간의 알흔 행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드디어 차가 항구에 도착한다. 알흔섬 가는 길 여덟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잠시 선착장에서 기다려 탄 배는 바지선이다. 차 몇 대를 싣고 나자 꽉 차버린 배는 십여 분 남짓 달려 알흔섬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알흔섬은 바이칼 호수에 있는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남북의 길이 약 77㎞인 이 섬은 초생달 모양인 바이칼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흔섬은 몽골리안이 발원한 곳이다. 그러니 알흔섬 여행은 내 몸 속 깊고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원시적 생명의 발원지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알흔섬 선착장에서 한 시간을 더 달려 우리가 닿은 곳은 캠프장. 그곳 유르트(몽골의 게르; 천막집)에 짐을 푼다. 천막 가장자리로 네 개의 침대가 놓여 있는 이동식 가옥이다. 부리야트인들은 이 이동식 주택인 유르타를 옮겨가며 순록의 먹이를 찾아 야블로이 산맥을 넘고 흥안령을 지났다고 한다.

나도 부리야트 사람처럼 유르타 안의 침대에 몸을 던져 본다.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진다.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밤, 백야의 일몰 속에서 내 몸은 오래 전에 떠났던 고향 마을에 돌아온 듯 더 없이 가라앉는다.

그날 밤, 부리야트의 샤먼 발렌틴이 우리를 반겨 준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는 부리야트의 신화를 시처럼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말도 등장한다.

울란우덴에서 대학원까지 다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그는 부리야트의 세습무다. 그의 얼굴과 몸집은 우리네 고향 마을의 아저씨를 그대로 빼다 박았는데, 역시 우리가 몽골리안임을, 그 뿌리가 바로 이곳임을 그의 겉모습만 보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부리야트 샤먼인 발렌틴. 그를 보면 몽골리안의 시원지가 알흔임을 느낄 수 있다.
부리야트 샤먼인 발렌틴. 그를 보면 몽골리안의 시원지가 알흔임을 느낄 수 있다. ⓒ 최성수

그는 높낮이가 이어지는 부리야트 말로 음유하듯, 낭송하듯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닥불은 피어오르고,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그의 손짓과 표정은 잊혀진 옛 신화의 한 자락을 따라 가는 듯하다.

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내게는 샤먼의 주술보다는 한 편의 서사시로 읽힌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영웅담, 백조와 사슴과 자작나무의 이야기가 쓸쓸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설과 독설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서사시는 외로움이면서 스러져가는 쓸쓸함일 수밖에 없다. 제정일치 시대의 대제사장에서 이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샤먼의 비애일까? 그의 표정도 사뭇 허전해 보인다

밤을 지샐 듯 타오르는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와 누운 알흔에서의 첫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신성스런 불칸바위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니 바이칼 호수 저편으로 아득하게 층층 구름이 떠 있다. 갈매기 떼들 소리도 요란하게 알흔의 아침이 밝은 것이다.

우리의 발길이 먼저 닿은 곳은 불칸바위다. 이곳이야말로 몽골리안의 시원지이고 샤먼의 발원지다. 세상에서 신령스러운 것은 늘 대조적인 풍경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한없이 낮고 부드러운 구릉 끝에 저렇게 우뚝한 바위가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리야트인들은 이곳을 성스러운 곳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불칸 바위는 샤먼들이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하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불칸바위. 코리부리야트족의 시원지. 더없이 맑고 푸른 생명의 공간이다.
불칸바위. 코리부리야트족의 시원지. 더없이 맑고 푸른 생명의 공간이다. ⓒ 최성수

부리야트인들 중에서도 코리부리야트족들의 시원지가 바로 이 불칸바위라고 한다. 몽골의 여시조인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코리부리야트족인데, 이들 코리부리야트족 중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바로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 민족의 시원지가 바로 이곳 불칸 바위인 셈이다.

불칸 바위로 가는 길은 그래서인지 마음을 안온하게 가라앉게 하는 구릉을 지난다. 깎아지른 바닷가에 우뚝 선 바위지만, 그러나 가는 길은 더없이 평안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게 만들어진 좁은 길도 결코 위험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마음 그대로 길 위쪽 능선을 바라보니, 시린 하늘 아래 소 한 마리가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다. 마치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소 같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주르르 미끄러질 곳이지만, 소 역시 위험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지천으로 핀 야생화를 뜯어먹으며 저 소는 불칸의 정기를 받고 있는 것일까?

불칸 바위 가는 길의 능선에서 야생화를 뜯고 있는 소. 나는 그 소를 하늘소, 부리야트의 장수 하늘소라고 생각했다.
불칸 바위 가는 길의 능선에서 야생화를 뜯고 있는 소. 나는 그 소를 하늘소, 부리야트의 장수 하늘소라고 생각했다. ⓒ 최성수

불칸 바위 아래 바이칼 물에 발을 담근다. 시리도록 차다. 하늘도 시리게 푸르고, 물도 시리게 차다. 마음의 때가 다 씻겨 나가는 듯하다. 넋 놓고 한동안 호수 물에 서서 불칸 바위를 바라본다.

그러자 내 몸 속 어느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원시의 생명 씨 하나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잊었던 고향, 원시의 기억 하나가 툭 내 가슴에 내려앉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을 지우며 우리 일행은 불칸을 떠나 섬의 끝으로 길을 재촉한다.

하보이 언덕으로 가는 길이다. 하보이는 바이칼의 작은 바다와 큰 바다의 경계다.

하보이 가는 길에는 알흔의 전형적인 풍경들을 싫도록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왼편으로는 바이칼 호수를 끼고, 오른편으로는 눈부시게 부드럽고 밋밋한 평원이 펼쳐진다.

"여러분은 지금 알흔섬에서 가장 큰 강을 지났습니다."

스베따의 말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도랑보다도 작은 물줄기를 건넜을 뿐이다. 그 물줄기가 알흔의 가장 큰 강이란다.

우리가 웃음을 터트리는데, 창 밖 지천을 펼쳐진 들판의 야생화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리고 흔들리며 여름을 견뎌내는 저 여린 꽃들의 지혜로움이 새삼 놀랍다.

차는 곧 숲 속으로 들어선다. 언제 평원이 있었더냐 싶게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물론 닦인 길은 없다. 그저 차들이 여러 차례 다녀 길이 되었을 뿐이다.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움푹 팬 길을 곡예라도 하듯 덜컹대며 빠져나가는 운전 솜씨가 놀랍다. 이쪽으로 쏠리고, 저쪽으로 밀리면서도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넋을 잃는다.

숲을 빠져 나오자, 모래 속에 묻힌 마을이 나타난다. 집들이 반쯤 모래에 묻혀 있고, 한때는 번성하던 오물 가공 공장이었던 곳도 폐허가 되어 버렸다. 반야(러시아식 사우나)였다는 집도 시커멓게 그슬린 채 모래에 스러지고 있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마을을 휩쓸어버려 폐허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시간 속에 스러진 부리야트 사람들의 신화의 잔영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삼형제 바위에 얽힌 설화

다시 낮고 평온한 평원을 조금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삼형제 바위다. 바이칼 푸른 호수를 등 뒤에 매달고 서 있는 삼형제 바위 앞에는 야생화 밭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알흔섬의 일몰. 황홀하고 엄숙하다.
알흔섬의 일몰. 황홀하고 엄숙하다. ⓒ 최성수

아득한 옛날, 알흔 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독수리였다. 그 독수리의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세 아들은 장성하여 세상을 돌아보러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독수리 왕은 먼 길을 떠나는 세 아들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나가 온갖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돌아오너라. 너희들이 보고 느낀 만큼 세상에 대한 눈도 더 넓고 커질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훌륭한 독수리가 되어 돌아오리라 믿는다."
"예, 아버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독수리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아버지 독수리는 다시 세 아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모든 일을 너희들이 판단해서 하되, 단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결코 사람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 고기는 절대 먹지 않겠습니다."

세 아들 독수리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담고 창공을 차고 올라갔다. 그리고 세상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너무나 허기진 아들 독수리 세 마리는 날개에 힘이 빠져 날갯짓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탓이었다.

집 가까이 거의 다 와 갈 무렵이었다. 마침 세상에 큰 전쟁이 일어나 죽은 사람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 독수리는 시체를 보자 더 허기가 져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산 사람도 아니잖아. 그냥 먹어 볼까?"
"그래, 아버지도 산 사람만 먹지 말라는 말이었을 거야."
"허기져 죽느니 죽은 사람 고기라도 먹는 게 낫겠지 뭐."

그렇게 생각한 세 독수리는 시체를 파먹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 고기로 배를 채운 세 독수리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아버지에게 돌아왔음을 알렸다. 아버지는 헌헌장부가 되어 돌아온 세 아들 독수리에게 물었다.

"고생했구나. 그래, 이 아비의 말대로 사람 고기는 먹지 않았겠지?"

아버지의 말에 아들들은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산 사람 고기는 먹지 않았어요.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 전쟁에 죽은 사람 고기를 조금 먹었습니다."

아들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 독수리는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사람 고기는 절대 먹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 말을 지키지 않다니. 우리 독수리는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는 존재다. 그런 너희들이 사람의 고기를 먹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는 세 아들을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그 뒤부터 세 아들은 바이칼 알흔섬의 바위가 되어 모진 바람과 거센 물살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살게 되었다.


삼형제 바위. 바이칼을 등 뒤로 업고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독수리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삼형제 바위. 바이칼을 등 뒤로 업고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독수리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 최성수

삼형제 바위에 얽힌 설화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부리야트인을 생각한다. 독수리는 인간계와 천상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물이다. 코리 부리야트족에 전해오는 나무꾼과 선녀의 설화의 날개옷과 같은 역할이 바로 독수리인 셈이다.

패랭이꽃 붉게 피어 바이칼의 나직한 바람과 햇살에 제 몸 익혀가는 삼형제 바위 앞의 한 여름은 상쾌하고 편안하다.

큰 바다, 바이칼

그 편안함을 안고 조금 더 달려 도착한 곳은 큰 바이칼과 작은 바이칼의 경계인 하보이다. 낮은 숲길을 지나고, 또 지천인 야생화 들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를 듯 아슬아슬한 절벽이 오금을 저리게 한다. 그 절벽 아래가 큰 바이칼, 큰 바다다.

비로소 바이칼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다. 눈부시고 오싹한 바이칼, 시리고 아득한 바이칼, 그 끝에 서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덧없고 미미한 것인지.

일행 중 한 명이 너르디너른 바이칼 큰 바다를 보며 한마디한다.

"이 큰물을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 발견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런 말을 할 만큼 바이칼 큰 바다 쪽은 끝없이 너르다. 길이 약 400㎞, 둘레는 2천㎞, 해발 450m, 최대 수심 약 1600m인 바이칼은 인류가 30년을 먹을 만큼의 저수량을 지니고 있는 지구 최대의 호수다. 그 어마어마한 단위 앞에서 인간은 할 말이 없다. 자연이 아니면 그 누가 이런 깊이와 너비의 호수를 만들어낼 것인가.

바이칼의 물빛만으로도 이곳이 세계의 중요한 인종인 몽골리안의 시원이라는 것을, 과학이 아니라 전율로 느낄 수 있다. 거대한 물의 깊이 모를 존재 앞에서 여린 야생화들은 피어나고, 물에서 시작된 바람에 잠시도 쉴새없이 생명을 피워 올린다. 그리고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꽃이 되고, 꽃은 햇살이 되고, 햇살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사람이 되는 곳, 바이칼!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돌아오는 길, 마음속에는 바이칼의 짙푸른 물너울과 아슬아슬한 벼랑, 그 벼랑 끝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며 피어나는 야생화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새 가득 차 있다.

창 밖으로는 야생화를 베어 건초 더미로 쌓는 부리야트 사람들이 보인다. 긴 낫으로 슥슥 베어가며 쌓아둔 건초더미는 모두 야생화들이다. 그 야생화 건초를 먹으며 소와 말이 자라고, 그렇게 자란 말을 타고 다니는 순한 사람들이 사는 땅, 알흔. 그곳은 인간의 행복한 땅이면서 동시에 소와 말, 아니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행복한 터전이다.

알흔. 한 겨울 혹은 한 해 여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죽은 듯이 저 너른 평원과 야생화의 숲에 숨어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머물다 가고 싶은 것은, 그곳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이 평화로운 우리네 몽골리안의 살과 피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은 아닐까?

알흔섬 가는 길의 선착장 화장실. 화장실도 자연의 일부 같다.
알흔섬 가는 길의 선착장 화장실. 화장실도 자연의 일부 같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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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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