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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주의 대표적인 경승으로, 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묵객들이 남한강을 지날 때면 반드시 들러보는 명소였던 여주 청심루 복원을 위한 문화계의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청심루(淸心樓)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으며, 청심루 복원은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지역문화계의 한 인사는 “청심루에 올라 시를 지은이들만 해도 이색·김구용·서거정·김안국·이황·유성룡·송시열·이병연·이항로·김좌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며 “청심루를 복원하면서 여주 문화계의 이름으로 각 문중에 시비 건립을 요청하면 강변로는 자연스럽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詩)의 거리로 조성될 수 있다”며 청심루 복원에 대한 필요성과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인 이모(43세)씨는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훌륭한 소재가 넘쳐나는데 여주군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여주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며 "인근 이천시에 비해 문화정책이 뒤떨어진다는 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청심루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정자로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등 고려의 대학자들과 인연이 깊은 정자로 유명하다. 우암 송시열이 숙종8년(1682년) 11월에 효종의 능이 있는 여주로 내려와 이듬해까지 머물렀을 때, 청심루에 올라 효종대왕릉을 바라보며 여러 편의 시를 지어 큰 글씨로 청심루의 현판을 새로 써서 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1779년(정조 3년) 여주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을 전배하고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의 충절을 기리고 별시를 치뤄 지역 선비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현재 여주초등학교 건물 바로 뒤편에 위치한 청심루에서는 남한강 상류쪽 신륵사의 동대(東臺)가 아늑하게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래로 오고가는 돛단배들이 그림처럼 전개된다. 청심루는 여주 팔경의 중심으로, 서울의 세검정·낙천정과 광주의 청풍루·남원 광한루·제주 관덕정 등과 더불어 나라에서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청심루기 1945년 8월 22일 당시 여주군수 관사의 화재로 인해 청심루 서쪽 5개 교실이 소실될 때 함께 불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 그 터에는 1987년 12월 26일 경기도에서 세운 ‘청심루터’라는 표석만 서 있다.

한편, 여주군문화원에서는 오는 10월 20일 여주군민회관 문화사랑방에서 서예가 덕초 전광홍(흥천면) 선생과 향토사학자 한승만(전 이천시공보과장)씨 등을 초청하여 청심루 복원을 위한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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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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