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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넓고 푸르른 바이칼 호수 위로 점같은 배가 떠간다
아득히 넓고 푸르른 바이칼 호수 위로 점같은 배가 떠간다 ⓒ 최성수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밖이 온통 자욱하다. 안개다. 내가 머문 숙소 밖으로는 앙가라강이 닿듯이 흘렀는데, 그 넓고 길던 강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강 가로 늘어서 있던 자작나무 가로수들도 윗부분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짙은 안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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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안개를 멍하니 내려다 본다. 자작나무들만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떠서 흐르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아오던 땅에서 떠나와 이름을 외우기조차 낯선 땅에 들어선 탓일까?

그날 아침, 자작나무도 나도 앙가라강도 허공을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정신 놓고 창 밖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바삐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선다. 이미 일행들 모두 나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바이칼 옛 철길을 따라 놓인 철로를 달리는 열차를 타러 가는 날이다. 환바이칼 열차 혹은 구철로라고 부르는 이 철길은 놓은 지 약 100년이 되었다고 한다. 바이칼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는 말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그 거대한 바이칼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야말로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차 시간에 늦어 숨이 가쁘게 달려가 탄 열차는 기대보다 깨끗하고 깔끔하다. 이르쿠츠크 역에서 이 기차로 약 두 시간을 달리면 슬루잔카다.

슬루잔카까지의 두 시간 여행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어쩌다 스치는 역에는 화등잔만한 눈을 번뜩이며 달려온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이국의 낯선 사람들을 위협이라도 하듯, 빵빵거리며 달려간다.

안개 낀 철길 위에 화등잔 같은 불을 밝히며 열차가 지나가는 슬루잔카
안개 낀 철길 위에 화등잔 같은 불을 밝히며 열차가 지나가는 슬루잔카 ⓒ 최성수
그 열차의 짐칸은 수십 개, 그 모두에 가득 소나무들이 실려 있다. 적송이다. 때로는 눈부신 자작나무들이 일정한 크기로 잘려 실려 있기도 하다. 저 나무들은 어디에서 베어져 어디로 실려 가는 것일까? 나는 베어진 나무를 보면 다른 무엇을 볼 때보다 마음이 아프다.

몇 해 전, 복직을 한 학교 주변이 재개발 지구로 지정됐다. 그때 철거해서 폐허가 된 집들 사이로 곱디 고운 꽃을 피우던 수수꽃다리가 너무도 안쓰러워 한동안 주저앉았던 적이 있었다. 그 곁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도 제 운명을 모른 채 푸른 잎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수꽃다리 나무도 은행나무도 밑둥만 남긴 채 베어져 폐허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 풍경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세월이 단칼에 베여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느낌이랄까?

슬루잔카까지 달리는 기차에서 마주친 기차에 실려 있던 그 아름드리나무들, 그 나무들이 견뎌내 왔던 숱한 세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안개 자욱한 철길을 따라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려가는데, 내 마음은 죽은 세월을 혼자 감당하는 것처럼 쓸쓸하고 허전하다.

바이칼 옛 철길 주변 창이 고운 집. 마음 착한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바이칼 옛 철길 주변 창이 고운 집. 마음 착한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 최성수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낮고 아련하다. 나무로 지은 집들과 집 마당에 막 꽃을 피우는 감자 포기. 해바라기는 아침 안개 속에 파스텔화처럼 아득한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긴 낫을 멘 농부가 지나간다. 그 농부 어깨 너머로 자작나무 숲이 비스듬하게 펼쳐진다. 그런 풍경을 나는 햇살도 없는데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본다. 마음이 흔들리는 탓이리라. 삶이 아닌 풍경으로 보는 여행자의 거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시간 빠른 속력으로 달린 기차가 멎는다. 슬루잔카 역이다. 잠시 쉬어 간다는 말에 얼른 기차 밖으로 내려선다. 역 구내에는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과 장사꾼들이 뒤엉켜 정신이 없다.

슬루잔카 역. 딸기와 오물을 파는 사람들이 정겹다.
슬루잔카 역. 딸기와 오물을 파는 사람들이 정겹다. ⓒ 최성수
딸기를 바구니에 담아 파는 사람도 있고, 바이칼의 특산 생선으로 만든 훈제 오물(러시아 생선)을 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역 구내에 걸어놓고 파는 책은 자세히 보니 포르노 잡지다. 역사를 따라 늘어선 상가에서는 물과 음료수, 맥주 따위와 이런저런 잡화들을 늘어 놓고 판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사 먹은 딸기는 달기보다 시고, 오물은 짜디짜다. 그래도 맥주 안주에는 짠 오물이 제격이라며 우리 일행들 모두 여행의 설렘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참 뒤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린다. 이제부터 바이칼 옛 철길이 시작된다. 흔히 환 바이칼 열차로 불리는 이 길은 이름처럼 바이칼을 휘감아 도는 철길은 아니다. 그 넓디 넓은 바다 같은 바이칼을 어떻게 한 바퀴 돌 수 있겠는가? 둘레 길이만 2000km라는 바이칼을 정말 한 바퀴 돌기 위해서는 며칠로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래서 환 바이칼이라는 이름 대신 구 철길로 부르기도 한다. 약 100년 전에 닦은 옛 길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이는 모양인데, 나는 그냥 옛 길 정도면 좋을 듯싶어 그렇게 부르고 만다.

이르쿠츠크에서 슬루잔카까지 꽤 빠른 속력으로 달려온 기차는 슬루잔카 역을 출발해 조금 지나더니 걸음을 늦춘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처럼 가는 기차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실컷 감상하라는 듯 어떤 곳에서는 아예 걷는 것보다 느리게 가기도 한다. 자작나무 숲이 지나가고 목책으로 울타리를 친 집들과 창문틀을 예쁘게 칠한 목조 주택들이 모여 있는 마을도 지나간다.

지천으로 핀 야생화. 그 너머엔 눈부시게 푸른 바이칼 호수
지천으로 핀 야생화. 그 너머엔 눈부시게 푸른 바이칼 호수 ⓒ 최성수
길 가에는 온통 야생화들이 그득하다. 한동안 노란 꽃들이 지천이더니 어느 곳에서는 엉겅퀴가 잔뜩 모여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다. 이질풀에 쑥부쟁이들도 계절을 섞어 가며 피어 있다. 가을꽃과 여름 꽃이 뒤섞여 피어 있는 바이칼 옛 철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동안 기어가듯 하던 기차가 갑자기 멈춰 선다. 사람들이 우루루 내려 철길 옆의 야생과 꽃밭 속으로 들어선다. 나도 따라 내려선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야생화는 더 아름답다. 철길이 야생화에 숨어 있는 것 같은 길이다.

철길 왼편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절벽 위에는 자작나무들이 눈부시게 서 있다. 오른편은 철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야생화 숲이다. 야생화를 피해 발을 디뎌도 야생화를 결국은 밟을 수밖에 없을 만큼 야생화는 지천이다. 모두들 꽃에 묻혀 사진을 찍고, 하나라도 더 바이칼의 야생화를 사진에 담아가려고 카메라 렌즈를 꽃에 댈 듯 다가선다.

바이칼 옛 철길 어느 집 화장실. 화장실 앞에도 야생화가 곱다.
바이칼 옛 철길 어느 집 화장실. 화장실 앞에도 야생화가 곱다. ⓒ 최성수
기차가 빵빵 소리를 지른다. 다시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고, 그러자 기차는 바쁠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들 꽃에 취한 것인지 얼굴이 불콰하다. 하도 꽃이 많아서 귀해 보이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너무 귀한 꽃이라 꺾고 싶어서였는지, 한 묶음의 꽃다발을 꺾어 온 사람도 있다. 그 꽃은 머리에도 꽂아 보고, 열차 좌석 앞 탁자에 놓은 꽃병에 꽃아 두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지, 열차 안내원도 배시시 웃는다.

한참을 느릿느릿 달리던 기차가 또 한 군데에 이르더니 멈춰 선다. 사람들이 내리더니 어디론가 정신없이 몰려간다. 호기심 많은 내가 줄레줄레 따라가 보니, 민가로 들어가더니 야외 식탁에 앉아 점심을 시켜 먹는다. 이미 열차 안에서 주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 후라 나는 그들이 점심 먹는 것을 구경하다가 바이칼로 흘러들다 잠시 멈춰 선 작은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 작은 물줄기들도 바이칼을 이루는 중요한 뿌리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런 것이리라. 작은 것들, 그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 한 세상을 이룬다. 우리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큰 덩이만 보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지만, 얼마나 많은 사소한 사람들이 모여 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철교가 보이는 어느 마을. 작은 호수가 야생화처럼 곱다.
철교가 보이는 어느 마을. 작은 호수가 야생화처럼 곱다. ⓒ 최성수
야생화들도 그렇다. 야생화들은 대개 하나만 보면 특별히 예쁠 것도, 유난히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수수하고 밋밋한 맛이 야생화에는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야생화들이 모여 이루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을 가득 덮는 야생화들이야말로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 수수한 것들의 곱디고운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더 야생화에 마음이 끌리는 지도 모른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다 바이칼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기차는 출발할 기미도 없다. 말을 들으니 이곳에서 두 시간 쉰단다. 이미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지, 바이칼 호수 주변에 모인 러시아 사람들은 웃통을 훌훌 벗어 던진 채 일광욕에 한창이다.

러시아 사람들 몸이 자작나무를 닮았다.  일광욕을 즐기는 바이칼 여행자들.
러시아 사람들 몸이 자작나무를 닮았다. 일광욕을 즐기는 바이칼 여행자들. ⓒ 최성수
어떤 사람은 아예 바이칼 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헤엄쳐 나가는 그 사람 너머로 바이칼 물빛이 눈부시게 푸르다. 끝 간 데를 모르게 아득히 펼쳐진 바이칼의 그 눈부신 푸르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도 많다. 러시아 아가씨들의 벗은 몸은 꼭 자작나무를 닮았다. 아니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작나무가 러시아 아가씨의 몸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아 러시아 자작나무처럼 눈부신 러시아 사람들의 몸을 바라보며 문득 프로스트의 시를 한 편 떠올린다.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들 사이로 자작나무가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떤 소년이 그것을 흔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눈보라처럼
나무를 영영 휘어져 있게는 하지 못한다.
비 온 뒤의 겨울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가?
바람이 불면 얼음이 흔들려 딸랑거리고
얼음 껍질이 갈라져 금이 가면서
오색빛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볕이 얼음을 녹여
언 눈 위에 수정처럼 떨어져 내리게 만든다.
부서진 수정 더미를 쓸어 버리면
그대는 하늘 천정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얼음 무게를 못이긴 나무들은
말라붙은 고사리에 닿도록 휘어지지만,
그러나 부러지지는 않는다, 비록
한 번 휘어버린 채 오래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금방 머리 감은 아가씨가
무릎 꿇은 채 엎드려 머리를 풀어 털듯이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힌
나무를 만날 수 있으리라.
얼음이 나무를 휘게 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끌고 나온 소년이
나무를 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촌구석에 살아 야구도 못 배우고
자기 스스로 만든 장난질이나 치며
여름도 겨울도 혼자 노는 소년
아버지가 가꾸는 나무를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휘고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거듭 오르내리며 나무를 정복하는 소년
그 소년은 마침내 배웠으리라,
성급히 나무에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법을,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아야 한다는 법을.
소년은 늘 나무 위로 기어오를 자세를 잡고
우리가 물 넘치는 잔을 다루듯
조심스레 나무를 탄다.
소년은 발이 가장 먼저 땅에 닿도록 몸을 날려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 그렇게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이었다.
지금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근심이 많아지고
인생이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에 거미줄이 걸린 듯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
나는 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사는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롭게 살고 싶어진다.
운명의 신이 억지를 부려
내 희망을 절반만 들어 주어
나를 데려간 뒤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 좋은 곳
내가 사는 세상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자작나무 타듯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늘을 향해 흰 눈빛 같은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까지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를 늘어뜨리며 맨 땅 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으리라.
자작나무를 흔드는 사람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을 테니까.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는 제목의 시다. 정말 인생은 길 없는 숲 같아 나도 거미줄에 감기고, 나무에 맞아가며 살아온 것 같다.

눈부신 흰 빛의 자작나무와 집. 이런 마을에서 석달 열흘 잠들고 싶다.
눈부신 흰 빛의 자작나무와 집. 이런 마을에서 석달 열흘 잠들고 싶다. ⓒ 최성수
먼 나라에 와 자작나무 그늘에 앉아 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스트의 시를 읽으며 내 삶의 남은 날들과 프로스트처럼 자작나무는 아니지만 학교 가는 길의 아득한 포플러 나무 위에 올라가 새 집을 보고 행복감에 젖었던 어린 날로 돌아가고 싶은 이 마흔 후반의 세월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자작나무 그늘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러시아 사람들을 보며, 자작나무에 대한 시를 생각하며, 자작나무를 타듯 살고 싶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세상길을 곡예하며 살아온 내 삶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깨우기라도 하듯 기차가 기적을 울린다. 어느새 갈아입었는지, 수영복 차림이던 사람들도 모두 평상복이다. 사람들이 다 타자 기차는 또 느릿느릿 걷기 시작한다.

얼마를 걷던 기차가 다시 멈춰 선다. 사람들이 또 내려 야생화 구경을 하다가, 기차를 앞질러 걷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가거나 말거나 기차는 멈춰 있다. 사람들이 한참 걸어간 뒤 기차가 슬금슬금 사람들의 뒤를 쫒는다. 기찻길을 걷는 사람들, 그 뒤를 따라 걷는 기차의 느긋함, 그래서 바이칼 옛 철길을 달리는 기차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다.

바이칼 옛 철길의 출발지인 슬루잔카에서 도착지인 바이칼 항구까지 겨우 20km의 길을 기차는 여덟 시간 동안 달린다. 아니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다. 그 20km의 길은 걷는 내내 야생화 밭이다. 그리고 눈부신 자작나무 숲의 흰 빛과 바이칼 호수의 푸르름이 어우러진 가슴 떨리는 길이다.

생명의 뿌리인 바이칼 호수 곁에서 야생화의 여린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며 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생명이 어우러진 곳, 그래서 바이칼 옛 철길은 아름답고 가슴 찡하다.

그곳에서는 자작나무 흰 빛이 푸른 바이칼 물살에 일렁이고 햇살 어룽대는 바이칼 물살에 자작자작 제 몸을 말리는 자작나무의 생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 가로는 온통 야생화 세상, 엉겅퀴 자줏빛으로 바람에 흔들리는데, 벌판처럼 천궁의 희디희게 피어나고 쑥부쟁이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흔들고 있다.

들꽃 천지에 파도 일렁이는 바이칼이 비쳐 드는지, 바이칼 물살에 들꽃이 어룽대는지, 황홀경에 젖은 나그네는 아쉬움에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바이칼 항구 건너 리스비얀카까지 잠시 가는 뱃길도 들꽃으로 가득한 듯하다.

리스비얀카의 목조 주택에서 그날 밤 내 잠결에는 온통 야생화 천지였다. 바이칼 물살에 흔들리는 한 송이 야생화처럼, 아니 야생화를 싣고 걸어가는 바이칼 옛 기차처럼, 내 마음은 푸근하고 느긋하게 가라앉아 깊이 모를 꿈에 젖고 있었다.

기차는 서고, 사람은 걷고. 사람보다 느린 기차,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바이칼 옛 철길.
기차는 서고, 사람은 걷고. 사람보다 느린 기차,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바이칼 옛 철길.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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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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