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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기자 주>

▲ 텍사스 주 헌츠빌에 있는 샘 휴스턴 동상
ⓒ 동상관리사무소
휴스턴에 가기 전에 샘 휴스턴의 동상에 들른 것은 올바른 순서였다. 도시에 이름을 준 인물부터 알고 가는 게 맞다. 휴스턴은 텍산(Texan)이라고 불리는 텍사스 토박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다 큰 어른들이 누구를 존경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데 텍사스인들은 대놓고 샘 휴스턴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텍사스에서 샘 휴스턴은 조지 워싱턴 이상이다.

동상은 댈러스에서 4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다 휴스턴에 도착하기 한 50분쯤 전에 도로 옆에 있다. 너무 커서 오히려 안 보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방문자 안내소까지 와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숲을 뚫고 한 50m 가니 고개가 아프도록 곧추 세우고 봐야 하는 뭔가가 있다. 기반만 해도 높이가 3m다. 그 위에 키 20.1m의 샘 휴스턴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건물 8층 높이에 있는 그의 눈동자는 넓은 텍사스를 굽어본다.

샘 휴스턴 동상 안내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상이다. 헌츠빌(Huntsville) 출신 조각가인 데이비드 애디케스(David Adickes)가 2년 10개월에 걸쳐 쇠와 콘크리트 25톤을 주무르고 끌로 깎아서 1994년에 헌정했다.

애인과 함께 동상을 찾은 제니퍼 왈레스(Jenifer Wallace·25)는 “휴스턴은 텍사스의 진정한 영웅”이라면서 그의 이력에 대한 소개를 자청했다.

텍사스는 1835년 멕시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멕시코와 35년 10월 2일 코스트(Cost)라는 곳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구실이 꽤 인상적이다. 멕시코 군이 그 동안 빌려준 대포 한 문을 돌려달라고 하자 “와서 가져가 봐라(Come and Take It)”며 거절한 것.

‘순진하게’ 가서 가져가려는 멕시코 군들을 작살낸 텍사스인들은 골리아드(Goliad)에 있는 요새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샌 안토니오(San Antonio)까지 진출한다. 이 승전을 계기로 “와서 가져가 봐”가 전쟁 구호는 물론 텍사스인들의 거센 기질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된다.

반격에 나선 멕시코의 산타 아나(Santa Anna) 장군은 5천여명을 이끌고 샌 안토니오로 가서 알라모(Alamo) 요새를 포위한다. 당시 알라모에는 윌리엄 트래비스(William Travis) 대령 휘하의 187명 병력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중과부적의 병력으로 멕시코 군과 13일간 용맹스럽게 대치하다 결국 대부분 장렬히 전사한다. 그 뒤 알라모는 ‘조국’ 텍사스에 대한 사랑과 텍사스인들의 용맹무쌍을 노래하는 전설로 남았고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텍사스인의 거칠고 독립적인 기질

▲ 샌 안토니오에 있는, 정면만 남은 알라모 요새의 모습
ⓒ 홍은택
전세가 멕시코 쪽으로 기울었을 때 텍사스 군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테네시주 주지사 출신의 샘 휴스턴이다. 그는 산타 아나군을 샌 하신토(San Jasinto)로 유인, 격파함으로써 텍사스의 독립을 지켜냈다. 샘 휴스턴은 초대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됐고 나중에 미국 연방에 텍사스가 편입됐을 때는 텍사스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냈다.

그는 남북전쟁에서는 ‘현명하게도’ 어느 편에도 서지 말고 중립을 지킬 것을 호소했으나 ‘사나운’ 텍사스인들은 투표로 연방정부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 동맹군에 가담했다. 그러자 휴스턴은 정계에서 은퇴했고 얼마 뒤인 1863년 세상을 떠났다.

텍사스인들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남부군에 서서 싸웠다. 언제까지 싸웠느냐면 남북전쟁이 끝났는데도 계속 싸웠다. 마지막 전투인 텍사스 주 팔미토 목장(Palmito Ranch) 전투는 이미 남부군 총사령관 리(Lee) 장군이 항복한 지 한 달 뒤에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텍사스가 이겼다. 이들은 북부군을 물리치고 ‘남부 동맹’ 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했다.

텍사스인들은 그렇게 질기다. 고환암을 이기고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를 6연패한 랜스 암스트롱(Lance Amstrong)이 바로 그런 질긴 텍사스인이고 그가 우승한 파리에는 텍사스 주의 깃발이 휘날렸다.

동상의 기반에는 샘 휴스턴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현명하게 그리고 가장 적게 통치하라.(Govern wisely, and as little as possible)”

이 말은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의 본산이 되고 있는 텍사스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다.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많은 2천만명이 사는 텍사스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나라다. 지형만 해도 7가지로 이뤄져 있다. 빅 벤드 컨트리(Big Bend Country)라고 하는 남서쪽의 국경 산악지대, 남동쪽인 걸프 해안(Gulf Coast), 중부의 구릉지대(Hill Country), 북쪽의 팬핸들 평원(Panhandle Plains), 동쪽의 소나무 삼림(piney woods), 댈러스 일대의 초지와 호수들(Prairies and lakes), 남쪽의 텍사스 평원(South Texas Plains).

▲ 휴스턴 시내의 가구점 앞에서 성조기와 텍사스 주기가 같은 위치에 걸려 있다. 텍사스는 하나의 작은 나라다.
ⓒ 홍은택
대체적으로는 막막한 사막 또는 평원이다. 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려면 웬만큼 강해서는 안 된다. 개중에는 다른 곳에서 어떤 연유에서인지 도망쳐 나온 사람들도 있다. 서로 사연을 묻기가 껄끄러워진다. 그래서 그냥 참견 안하고 사는 쪽이 속 편하다. 그래서 간섭을 싫어하는 게 자연스런 텍사스적 특징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오레곤 주 포틀랜드 출신으로 휴스턴에서 10년간 머무르고 있는 KOA 캠핑장 주인 샌드라는 “이렇게 자기 ‘나라’에 애착이 강하면서 동시에 간섭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인구 200만명이 넘는 휴스턴이지만 지역을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 용도별로 구분하는 존닝(zoning) 제도가 없다. 그녀는 “휴스턴에서 집을 사거나 지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집 옆에 병원이나 슈퍼마켓이 들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샘 휴스턴의 가능한 한 적게 통치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인구가 별로 없고 자원 분배의 문제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던 카우보이 시절의 낭만으로 해석해야 할 말인데 이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이데올로기가 됐다. 공화당의 ‘작은 정부론’이 그것이다. 이 ‘작은 정부론’은 규제완화 또는 탈 규제의 논리로 이어지고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자유방임형 경제 시스템을 지향한다.

그래서 텍사스는 친 기업적 보수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본산이 됐다. 미 하원 공화당의 보스인 톰 들레이(Tom Delay) 원내 대표(Majority Leader)는 텍사스 주 슈가 랜드(Sugar Land) 출신이다. 백악관의 주인도 텍사스 주 미들랜드(Midland)와 휴스턴에서 자라났다. 기업으로 치면 그런 자유방임형 경제 시스템이 낳은 총아가 바로 휴스턴을 본거지로 한 엔론이었다.

'작은 정부론'의 논리적 원류

스미스(Smith) 1400번지. 그렇게만 기록돼 있다. 50층까지 세다가 포기했다. 옆에 보니 똑같은 건물이 또 한 채 있다. 초고층 건물 두 채가 마치 샴 쌍둥이처럼 가운데에 탯줄 같은 유리 통로로 서로 연결돼 있다. 이렇게 큰 건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이름도 없이 일요일 오전의 햇볕을 눈부시게 튀기고 있다. 이 익명의 건물이 과거 엔론 쌍둥이 빌딩 중 하나다.

▲ 엔론 빌딩
ⓒ 홍은택
“이게 엔론 빌딩 맞는가?”

엔론 빌딩 앞에서 (섭씨 37도가 넘는 그 더운 날씨에) 책을 읽고 있는 한 중년 남성에게 물어봤다. 이 사람은 ‘맞다’고 하면서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마치 남대문 앞에서 남대문을 찾은 격이 됐다.

“왜 아무 표시도 없는가?”

“앞에 있는 쌍둥이 빌딩(루이지애나 1500번지)은 셰브론 텍사코(Chevron Texaco)에 팔렸고 뒤의 빌딩(스미스 1400번지)은 팔리긴 했는데 아직 입주는 안 했다. 그전에 건물 앞에 있는 엔론의 알파벳 ‘E’ 심볼은 경매에 넘겨져 헐값에 팔렸다고 하더라.”

자세히 보니 셰브론 상호가 있다. 여기서 일하는 셰브론 직원은 아직 500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 8천명이 일하던 곳이었으니 절간도 이런 절간이 없다.

"엔론은 어디 갔는가."

"근처에 있는 조그만 빌딩으로 이사 가서 빚을 갚기 위해 자산을 매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 엔론의 심볼 'E'가 사라지고 주소만 남았다.
ⓒ 홍은택
귀찮아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이는 대니 데이비슨(Danny Davidson·50). 그는 엔론 빌딩 옆에 있는 YMCA에서 살면서 엔론의 성장과 몰락을 코 앞에서 지켜봤다.

“성장도 빨리 했지만 몰락은 더욱 순식간이다. 마치 신기루를 본 것 같다.”

그는 ‘독립적인 생활을 위한 휴스턴 센터(Houston Center for Independent Living)’라는 단체의 봉사요원으로 일한다. 이 단체는 장애인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엔론이 전성기에는 대단했지 않은가?”

“그렇다. 그들은 너무 떼돈을, 거의 외설적으로 돈을 벌었고 썼다.”

레이와 스킬링

그 선두에 엔론의 CEO였던 제프리 스킬링(Jeffrey Skilling)이 있다. 그는 심복들을 이끌고 멕시코까지 1600km의 모터사이클 원정을 다녀오는가 하면 호주의 오지 사막을 4륜구동차로 질주하곤 했다.

밑에 있는 엔론의 에너지 중개인(trader)들은 트레저스(Treasures)라는 고급 식당에서 점심 시간에 70만원짜리 크리스털 샴페인을 비우고는 ‘VIP 룸’으로 자리를 옮겨 스트립쇼를 즐기곤 했다. 2002년 3월11일자 뉴스위크 기사에 나오는 얘기다. 이 주간지는 “1천 달러를 받으면 못할 게 없었다”는 한 스트리퍼의 말을 인용했다.

“어떻게 해서 엔론이 돈을 벌었는가.”

계속 데이비슨에게 물어본다.

“나도 전모는 모른다. 그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전기 가격을 조작해 폭리를 취한 것이다.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엔론은 캘리포니아에서 규제 완화의 붐을 타고 전기의 도매가격이 자유화된 점을 악용했다. 전기 공급을 일부러 줄이거나 때로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생산되는 전기마저 매점 매석해 캘리포니아 주에서 전기 수요가 폭증할 때까지 기다렸다. 캘리포니아에서 단전과 정전 사태가 일어나도 오불관언이었다. 살인적인 가격을 받고서야 전력을 공급했다. 이득의 규모는 수십억달러다.

▲ 엔론 빌딩을 가리키고 있는 대니 데이비슨.
ⓒ 홍은택
“당신은 얼마를 버는가?”

사회봉사단체에서 주는 월급은 짜다. 석사 학위가 있는 그는 연간 2만6천달러(31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그걸로는 생활비가 부족해 그는 밤에 따로 일한다. YMCA에 기숙한다고 해도 주당 127달러(15만원 상당), 한 달에 60만원이 숙박비로 나간다.

케네스 레이(Kenneth Lay) 전 엔론 회장은 바로 데이비슨이 묵고 있는 YMCA의 이사회 의장을 지냈고 평생 이사로 등재돼 있다. 윌리엄 필립스 YMCA 대표는 “레이 회장은 공정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일꾼이었다. 한 사람의 자원봉사자로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 레이 회장이 7월 9일 구속됐다. 엔론이 파산보호신청을 한 지 2년 8개월 만이다. 목사의 아들인 그는 체포되기 직전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험난한 시기를 겪을수록 신앙은 더욱 커지게 돼 있다. 이번이 내 인생에서 처음 맞는 고난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고난은 삶의 부분이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완벽할 거라고 약속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초한 고난이 아닌가. 더구나 자신은 물론 3만여명에 가까운 종업원과 캘리포니아의 주민들, 주식투자자들에게 끼친 경제적,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하고 마치 박해 받는 순교자처럼 말하고 있다.

검찰은 레이 회장을 엮기 위해 밑에서부터 차례로 직원들을 구속해 형량 경감을 대가로 레이 회장에 대한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 차근차근 체포의 수순을 밟아왔다. 지난 2년 8개월은 사실상 그에게 철창만 없는 유리감옥이었다. 이 시기를 그는 자가당착이든 아니든 간에 신이 준 시련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사실상 엔론이라는 거품을 만들어낸 제프리 스킬링 전 CEO는 4월 술집 앞에서 만취한 채 손님들과 격투를 벌여 병원에 실려갔다. 스킬링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오고 맥킨지의 컨설턴트를 지낸 엘리트 중 엘리트. 미국 잡지 'Worth'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에 이어 가장 유능한 CEO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잘난 스킬링으로서는 몰락과 책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의 대결

▲ 정경유착 의혹을 받고 있는 할리버튼사의 핵심부문인 KBR 사옥이 엔론 근처에 있다.
ⓒ 홍은택
엔론의 몰락은 미국에서 자유방임형 시장주의와 정부의 일정한 시장 간섭을 허용하는 질서 자유주의의 대충돌을 낳았다. 그 선봉에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가 있다. 엔론 사태로 드러난 에너지 시장 규제완화와 회계부정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자 월스트리트저널은 2002년 1월 18일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전향한 독일의 공산주의자 빌리 슈람(Willi Schlamm)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자본가들이고 사회주의의 문제점은 사회주의다’라고. 우리는 엔론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그 구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고 몇몇 자본가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엔론은 잘못 경영한 경영인의 문제이지, 규제완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엔론 사태 초기인 2001년 11월 2일자에서부터 “엔론은 월스트리트에 강력한 규제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며 규제 강화론을 주창했다.

규제 완화의 문제점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 엔론의 캘리포니아 주 전력난 악용 사례에 대해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은 “엔론이 폭리를 취했다는 증거도 없고 원래 규칙을 역이용하는 게 중개인(trader)이 하는 일”이라고 옹호했다.

회계부정을 막기 위한 개혁에 대해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예 회계감사 규정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했다.

"회계 감사에 대한 의무 규정을 없애버리고 CEO들로 하여금 숫자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자. 그러면 CEO들 스스로 신뢰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믿을 만한 회계감사를 알아서 받지 않겠는가." (2002년 1월18일 사설)

엔론이 정치권, 특히 조지 W. 부시의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한 것에 대해서도 뉴욕타임스는 “권력에 대한 접근과 영향력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 반면 월스트리트저널은 “그것은 (불필요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돈”이라고 말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후 플로리다 주 재검표 파동이라는 결정적인 시기에 부시 후보 진영이 타고 다닌 비행기는 다름 아닌 엔론의 회사 전용 제트기였다. 엔론은 부시 진영의 피보호자가 아니라 후견인이었다.

어쨌든 엔론 사태를 계기로 미국 사회에서는 회계부정을 감독하는 기관이 신설되고 선거자금 개혁법이 통과됐다. 미온적이지만 과거보다 진일보했다. 뉴욕타임스에서 경제담당 사설을 쓰는 안드레스 마르티네즈(Andres Martinez) 논설위원과 인터뷰가 이뤄졌다.

-충분한 개혁이 이뤄지긴 한 것인가.
“금융 규제 시스템이 강화되기는 했지만 항상 위기가 터지면 있기 마련인 사후 수습책들이다. 전보다는 부정을 저지르기 어렵게 됐지만 부정을 막는 시스템을 완벽히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뉴욕타임스가 촉구한 대로,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몇 개혁은 이뤄졌다. 뉴욕타임스의 영향력이 먹힌 것인가.
“우리의 영향력이나 역할에 대해 내가 말할 입장은 아니다. 워싱턴에서는 수많은 기업 로비스트들이 집결해 개혁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큰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그래서 계속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혁에 대한 반대세력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는 엔론 사태에 이어 터져나온 월드컴의 엄청난 회계부정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주의자, 뉴욕타임스는 규제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제 3자로서 우리와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 논조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있다. 다만 내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시장의 자체 교정 기능을 보다 신뢰하고 우리는 시장의 불완전성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규제의 필요성을 더욱 믿는다는 것이다.”

▲ 케네스 레이 전 엔론 회장이 33층 1개층 전체를 쓰고 있는 34층짜리 헌팅돈 아파트.
ⓒ Magellan's Log 제공
차를 돌려 레이 회장 부부가 거주하던 아파트로 향했다. 리버 오크스(River Oakes)에 있는 34층짜리의 초고층 아파트다. 커비 드라이브(Kirby Drive) 2121번지. 입구에는 관리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침실 한 개짜리 아파트가 70만 달러(8억4천만원)를 넘는다. 꼭대기층에 있는 집은 180만달러(21억6천만원)다. 한국의 타워팰리스보다 더 비싼 것 같다.

레이 회장은 이 중 한두 채가 아니라 33층 전체를 쓴다. 휴스턴이 속해 있는 해리슨 카운티의 데이터베이스에 조회하자 엔론이 망할 때인 2001년 레이 회장 소유 아파트에 대한 평가액은 568만5900달러(68억원)였다. 그가 구속되기 직전인 6월 24일 기준 평가액은 756만7700달러(90억7천만원)으로 앉아서 3년만에 22억원을 벌었다.

엔론 사태로 가진 재산의 95%와 은퇴 연금의 99%를 잃었다지만 아직도 수백만 달러를 수중에 갖고 있고 그 재산은 다시 커지고 있다. 그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하나로 뭉쳐 있으며 모두 건강하다. 그리고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살아남는다.

데이비슨은 헤어지기 전 밤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끈덕지게 물어보자 망설임 끝에 털어놓았다. 보수주의 성향의 싱크 탱크에서 전화 여론조사원으로 일한다고. 오후 6시 반에서 11시까지다. 저녁 시간 가정의 평온을 깨는 게 그의 일이다. 이런 전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밤낮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낮에는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다 저녁에는 보수주의적 여론 조성을 위해 다이얼을 누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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