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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많아서일까. 크지 않은 눈에는 미소가 자글자글 하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영락없이 '스마일'이다. 늘 환한 그의 인상은 긍정적이면서 낙천적인 성격을 숨김 없이 보여준다. 성공 벤처의 CEO이면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 수수하기 짝이 없고 그러면서 언제나 활기차다.

못 다 이룬 개그맨의 꿈?

▲ 하우리 권석철 대표
ⓒ PC사랑
안철수연구소와 함께 국내 백신 시장을 이끄는 하우리의 권석철 대표. 나서기 좋아하지는 않지만 천성이 밝고 쾌활하다. 개그맨을 꿈꿨다는 독특한 이력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요즘은 내공(?)이 딸리지만 예전에는 입만 뻥긋하면 다들 쓰러졌단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을 잘 웃겼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개그맨 시험을 쳐 보라고 하도 권해서 94년 SBS 개그맨 콘테스트에 도전했지요. 이것저것 잔뜩 준비해갔지만 너무 긴장해서인지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떨어졌어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색다른 경험이어서일까? 지하철에 사람을 밀어 넣는 '푸시맨(push man)'과 반대되는 '풀맨'(pull man)을 주제로 10분짜리 시나리오를 짰다는 둥, 그런데 겨우 1분 하다가 잘렸다는 둥 신이 나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만약 그때 합격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싫지 않은 상상인 듯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한마디 툭 던진다.

"인기 없는 3류 개그맨이 되어 있겠지요."

생각만이라도 충분히 화려할 수 있으련만 그는 늘 그렇게 꾸밈이 없다. 벤처로는 보기 드물게 대방동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벤처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강남의 테헤란 벨리로 갔지만 임대료가 비쌌고 직원들이 화려함에 취해 업무에 소홀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출퇴근도 어렵잖아요. 음식도 시켜먹을 수 없고…."

권 대표는 얼마 전 임대료를 아껴 모은 돈으로 회사 근처 아파트를 직원들 숙소로 꾸몄다. 밤샘 작업이 많은 직원들이 편히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강남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사무실이 여의도 방송국과 가까우니 자주 인터뷰를 하고 덕분에 회사가 널리 홍보되는 효과도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바이러스 수집에 홀딱 빠져

권 사장이 바이러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89년 인하공업전문대학교 전산학과에 입학하고서다. 바로 그 해 학생들끼리 프로그래밍 실력을 겨루는 학술제에 나가려고 몇날 며칠 고생해서 만든 소프트웨어가 바이러스 공격으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88년이었을 겁니다. 안철수 CEO가 컴퓨터 잡지에 브레인 바이러스와 관련된 글을 실었는데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이런저런 바이러스가 학교 PC를 감염시키는 것을 지켜보았지요. 그러다 제가 직접 당하니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정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더군요."

처음에는 바이러스 샘플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바이러스 하나를 얻기 위해 플로피디스크 한 통을 넘겨준 적도 있다. 바이러스를 담은 5.25인치 디스켓이 쌓여갈수록 열정적인 그의 수집은 더욱 불이 붙었다.

"바이러스를 분석할 능력은 없었지만 그냥 긁어모았어요. 모으는 것이 인생의 목표나 되는 듯. 그렇게 질리게 모으고 나서야 비로소 분석을 시작했어요. 국내 자료가 부족하면 외국 서적을 뒤졌고, 외국에 여행가는 사람에게 책을 사다 달라고 부탁도 했어요. 영어 사전을 보면서 죽어라 공부했지요."

넉넉지 않은 용돈으로는 한껏 달아오른 공부 욕심을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한국전력에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귀동냥으로 그 곳 도서관에 바이러스 자료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유리창을 닦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부리나케 도서관으로 달려가 자료를 한아름 복사해왔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정도로 달달 외웠다.

바이러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졸업 뒤 직장을 다니면서 PC통신 천리안의 '바이러스 치료 동호회' 시삽으로 활동하는 이중 생활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회원들과 정보를 주고 받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창업 멤버를 만났다는 게 소중한 수확이다.

"회원들 중에서 저를 포함해 5명이 잘 어울렸습니다. 다들 실력도 좋았고요. 부산 광안리에서 의형제를 맺고 백신 회사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하우리라는 이름은 하늘 아래 우리가 있는데 어떻게 바이러스가 덤빌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지요."

CIH 바이러스로 유명해져

98년 3월 양재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하고 각자 쓰던 PC를 가져왔다. 서너 평이 안되는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닻을 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성공 벤처의 모델로 삼았던 한글과컴퓨터가 경영 악화로 외국 업체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가 그렇게 되니 충격이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가 나름대로 연구를 했는데 결론은 순발력 부족이었습니다. 운영체제는 도스에서 윈도우즈로 넘어갔는데 그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도스를 과감히 버리고 윈도우즈 백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도스, 리얼타임 OS, 유닉스 등을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회사 살림도 형편없었다. 국가 연구 과제로 직원들 월급 겨우 주고 창업자들은 몇 달째 빈털털이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6천여 개의 바이러스 샘플을 모아 분석했고 윈도우즈용 치료 엔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진 고생 끝에 99년 1월 백신 프로그램 '바이로봇'을 내놓았다. 처음 몇 달간은 반응이 시큰둥했지만 몇 달 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99년 4월 CIH 바이러스가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이때 바이로봇이 엄청나게 팔려나갔어요. 종전의 백신은 검색만 할 뿐 치료하지 못했지만 바이로봇은 검색부터 치료까지 척척 해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사실 권 사장은 6천여 바이러스 샘플을 모으는 과정에서 일찌감치 CIH를 접했다. 도스 백신으로는 절대 치료할 수 없으며 피해가 엄청나다는 사실도 가장 먼저 알아냈다. 이미 윈도우즈 백신을 연구하고 있던 터라 치료 엔진을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창업 초기 바이러스 샘플을 열심히 모아 분석한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하우리는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져 99년 한해에 20억원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권 사장은 못내 아쉽단다.

"변변한 수익이 없다가 20억원이라는 큰 돈을 벌었으니 축하할 일이지만 그때 경쟁사는 100억원을 챙겼어요. CIH 바이러스의 피해 증상을 가장 먼저 정확히 짚어내고 치료까지 했지만 우리의 기술력은 경쟁사의 지명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님다' 덕에 세계적 업체로 성장

CIH가 하우리를 국내 시장에 널리 알렸다면 2001년 9월 나타난 '님다'(nimda)는 이들을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 시작은 2001년 7월 나타난 '코드레드'(code red)가 이끌었다.

기존의 바이러스가 파일 형태로 존재하는 것과 달리 코드레드는 네트워크에 기생하면서 특정 시스템을 공격하는 '웜'(worm)이었다. 전혀 새로운 악성 파일인 탓에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백신 업체와 네트워크 회사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독일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코드레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며 다들 손을 놓고 있더군요. 그러나 웜도 결국은 인터넷 시대에 바이러스가 진화한 것이니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다그쳤습니다. 엔진을 다 뜯어 고쳐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결국 치료 백신을 만들어냈습니다."

코드레드는 사실 미국 백악관을 공격한다는 이유로 '웜'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렸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 뒤 나타난 님다는 인터넷을 휩쓸다시피 했다. 세계적으로 단 하루 만에 PC 100만대 이상이 감염되었고 며칠 새 감염 PC는 830만대로 늘었으며 피해액은 최소 59000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님다는 코드레드와 비슷한 웜이에요. 코드레드를 치료한 경험이 있는 우리는 그 기술의 일부를 이용해 님다를 치료하는 엔진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내놓았습니다. 하우리의 이름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순간이지요. 외국에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 기술을 사겠다는 경쟁 업체들의 러브 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님다 사건을 거치면서 세계적 백신 업체로 거듭난 하우리는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작년 한해만 해도 권 사장은 30여 차례나 해외 출장을 떠났다. 해외 법인을 둘러보고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느라 한 달이면 20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는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

"외국 고객 중에는 우리 회사를 모르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이 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요. 회사 네트워크에 웜 바이러스를 심어놓고 다른 백신들과 테스트를 합니다. 시만텍이니 트렌드니 하는 다국적 회사들은 고치지 못하는데 하우리는 고치거든요. 다른 백신은 왜 못 고치는지, 하우리는 어떻게 잡는지 알려줍니다. 다 듣고 나면 기립박수를 치지요. 기술에 자신이 있으니 이런 공격적인 마케팅이 먹히는 겁니다."

2인자의 설움, 해외에서 푼다

권 사장은 얼마 전 브라질 현지 법인에서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브라질 정부가 주는 품질관리상을 하우리가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2000년 맥아피, 2002년 트렌드에 이어 2004년 하우리가 영광의 자리에 선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단 3개 기업, 한국에서는 삼성과 하우리만이 이 상을 받은 것입니다. 남미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브라질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거대한 남미 대륙을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권 사장이 해외 진출에 유난스레 매달리는 이유는 '2인자'의 한을 풀기 위한 뜻도 숨어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안철수연구소의 명성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V3'라는 최초의 백신이 갖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두텁게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벽을 허물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1위 자리를 뺏기 위해 무리하게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둘다 세계적인 업체인데 좁은 국내 시장에서 부딪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서 이름을 날리면 자연스레 국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을 것입니다."

권 사장은 하우리가 2008년까지 세계 5대 백신 업체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주먹을 불끈 쥐며 두고 보란다. 그는 늘 이렇게 자신감에 차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게 없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의 에너지는 바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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