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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만 가옥의 전경
김상만 가옥의 전경 ⓒ 강지이
호남지역 거부의 자손이었던 김성수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김상만 가옥의 표지판에는 그가 '우리나라 근대기에 교육가와 언론인 그리고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커다란 자취를 남긴 사람'이라는 안내가 있다. 이와 함께 일민 기념비와 같은 동아일보 및 김성수의 가계와 관련된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역사적인 평가에서 김성수는 당시 대중적 언론이 미비하던 시점에 신문사를 창립하고 거의 최초의 근대적 신문을 발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친일 언사와 행동으로 인해 언론인으로서 지켜야할 도덕적 책무를 저버린 인물이었다.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는 1939년 9월 서울시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을 호소하였으며 이른바 황국신민화 운동에 적극 앞장서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징병이 극심했던 1940년대에는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축소 평가한 채 김상만 가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인촌 김성수가 역사적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임을 과시하는 안내판들은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김상만 가옥에 놓인 굴뚝
김상만 가옥에 놓인 굴뚝 ⓒ 강지이
중농주의(重農主義) 사상으로 평생을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바쳤던 유형원의 무너져 내린 사적지. 그리고 세태에 부합하여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꾀했던 인촌 김성수를 기념하는 기념비들.

굳이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각을 들춘 이유도 이 두 사람이 머물던 공간이 이렇게 대조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적 평가를 올곧게 보는 후대인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갖추어야할 역사 의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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