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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은빈이가 여름방학 내내 놀기만 하다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다음주 월요일이 개학인데 방학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 밥을 먹으면서 은빈이가 여름방학이 너무 짧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방학이 길어서 좋겠다고 합니다. 한달 넘게 먹고 놀고 자고 한 것 밖에 없는데 방학이 짧다고 합니다.

그동안 너무 잘 먹고 놀아서 살이 포동포동 쪘습니다. 은빈이는 하루 세끼 중 끼니를 거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어느 때는 초저녁에 잠을 자고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배고파 죽겠다고 밥 달라고 자기 엄마를 깨우기도 합니다.

▲ 방바닥에 엎드려 일기를 쓰는 은빈이. 어느 세월에 다 쓸 것인가?
ⓒ 박철
오늘 아침 달리기를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은빈이가 무엇 때문에 골이 났는지 툴툴거립니다. 아내에게 은빈이가 왜 화가 났냐고 물어 보았더니 한 달 동안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 하니 저 혼자 속상해서 저런다는 것입니다.

"은빈아! 거봐라. 만날 먹고 놀기만 하다가 한꺼번에 일기를 쓰려고 하니 힘들지?"
"아빠! 제가 언제 매일 놀기만 했다고 그래요?"
"아빠는 방학 내내 너 공부하는 거나 일기 쓰는 걸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너 아빠 몰래 숨어서 공부했냐?"
"아빠! 제가 어제 저녁부터 일기를 썼는데 매일 놀기만 했다고 그러세요?"

은빈이는 만날 놀기만 했다는 소리에 단단히 뿔이 났습니다. 한 달 치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 하니 골이 났던 차에 내가 눈치도 없이 불을 질러댔으니 이제 모든 불평이 나에게 쏟아질 판입니다.

은빈이가 거실바닥에 엎드려 일기장에 연필을 갖다 대고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니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유년시절, 나는 여름방학이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방학숙제와 일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놀기에 바빴습니다.

집 앞 개울은 동네 조무래기들의 다양한 놀이 공간이었습니다. 자연히 물과 친해져서 개헤엄을 치고, 너럭바위에 올라가 다이빙도 하고, 싸리가지를 꺾어다 칼싸움도 하고, 배가 고프면 가재도 잡아 구워먹고, 옥수수대를 꺾어 단물을 빨아먹기도 했습니다. 매일 노는데도 늘 심심했고, 배가 고팠습니다.

▲ 여름휴가 때 덕동계곡에서.
ⓒ 박철
그렇게 여름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며칠 앞두고 비상이 걸립니다. 그제야 책 보따리를 찾습니다. 선생님께 야단맞을 게 두려워서 방학숙제를 하고, 한 달 치 일기를 썼습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큰맘을 먹고 일기장을 펴놓고 연필을 잡으면 왜 그리 졸음이 오는지, 꾸벅꾸벅 졸면서 일기를 쓰는데 써야 할 말이 생각나야지요. 한 달 내내 거의 똑같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대충 이렇게 일기장에 적었던 것 같습니다.

"19○○년 8월 ○○일, 맑음. 아침밥을 먹고 개울에게 가서 헤엄을 치고 놀았다. 다이빙을 하는데 무서웠지만 재밌었다. 한참 재밌게 노는데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신다. 허겁지겁 달려가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잤다."

꾸벅꾸벅 졸면서 쓰다보니 침을 흘려 일기장에 침 흘린 자국이 남기도 했습니다. 6학년 때는 하도 일기가 쓰기 지겨워 어느 날은 아무 말도 쓰지 않고 “이하동문”이라고 썼는데, 교단에 불려나가 선생님께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은빈이는 일기장을 붙들고 달력을 확인해 가며 아내에게 묻습니다.
"엄마! 8월 3일 우리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야,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아니?"

자기 엄마가 건망증이 심하다는 걸 은빈이가 몰라서 묻는 것일까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자 은빈이는 더 툴툴거립니다.

"은빈아! 너 만날 먹고 놀고 했잖아? 그냥 간단하게 써봐!"
"아빠! 어떻게 일기를 그렇게 써요? 그럼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애란 말이에요?"

은빈이가 오전 내내 일기장을 붙들고 씨름을 하더니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나 봅니다. 지금은 텔레비전 만화에 빠져있습니다. 은빈이 일기를 슬쩍 들여다보았습니다.

▲ 활짝 웃는 은빈이. 아무 걱정이 없나보다.
ⓒ 박철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교회에 갔다. 장로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요셉이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모 생일이다. 케이크, 갈비, 아이스크림, 사탕… 배가 터지게 먹었다. 아빠는 혼자 교동에 내려가시고 엄마와 나는 서울에 남았다. 아빠 혼자 쓸쓸하겠다."

"서울 외할머니 집에 갔다. 현서, 윤서를 만났다. 윤서는 자기 이름만 불러주어도 좋아한다. 윤서는 갓난아이라 아직 말을 못한다. 말을 못하는 대신 잘 웃는다. 웃는 모습이 예쁘고 귀엽다."

"여름휴가를 갔다. 덕동계곡으로. 성미, 성우, 현민 오빠, 현승, 광현 오빠, 넝쿨 오빠와 물놀이를 하는데 광현 오빠가 계곡물에 오줌을 쌌다. 그리고 광현오빠가 그 물을 먹었다. 자기 오줌은 더럽지 않은가 보다."

제법 자기 생각을 잘 끄집어내서 쓴 것 같습니다. 이제 몇 장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만화에 빠져서 일기는 까맣게 잊고 있지만, 저녁 무렵이면 식구들을 못살게 굴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엉터리 일기는 어른이 되어서까지 재밌는 추억거리로 등장하지요.

우리 은빈이 일기장에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몇 장이나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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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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