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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13도창의군탑을 참배하는 의병정신선양회원과 왕산 후손들
망우리 13도창의군탑을 참배하는 의병정신선양회원과 왕산 후손들 ⓒ 박도
서로 몰라보는 독립투사 후손들

지난 16일 의병정신선양회(회장 윤병석 전 인하대 사학과 교수)에서는 광복절 59주년 기념행사로 마지막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의 항일 전적지인 경기도 연천 일대와 남북분단의 현장인 휴전선 답사행사를 가졌다.

행사 첫머리에 망우리 소재 '13도 창의군탑(十三道倡義軍塔)' 참배에는 의병선양회 회원, 광복회 회원 및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여럿이 모여 왕산 선생을 추모했다.

이 모임에는 왕산 후손들도 참석한 바, 마침 러시아에서 광복절 해외동포 초청으로 일시 귀국한 왕산 선생의 증손녀 미라씨와 기라리이샤씨도 참석하였다. 그날 국내에서 참석한 왕산 선생의 다른 증손들과는 모두 초면이라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날 행사를 주관한 윤우 의병선양회 부회장이 이들 한 사람씩 소개를 시키며 서로 인사를 시켰다. 윤 부회장은 "여러분, 이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현실입니다"고 말씀하면서 울먹였다.

13도 창의군탑에서 처음 만나는 후손들. 왼쪽부터 러시아에서 온 왕산 증손녀 미라, 기라라이샤, 윤병석 회장, 외손 이항증, 권영조, 증손 허윤, 증손부 이민씨를 목발 짚은 윤우 부회장이 울먹이며 서로 인사시키고 있다.
13도 창의군탑에서 처음 만나는 후손들. 왼쪽부터 러시아에서 온 왕산 증손녀 미라, 기라라이샤, 윤병석 회장, 외손 이항증, 권영조, 증손 허윤, 증손부 이민씨를 목발 짚은 윤우 부회장이 울먹이며 서로 인사시키고 있다. ⓒ 박도
사마귀가 수레를 막듯 일으킨 의병

왕산 선생께서 옥중에 있을 때 일본군 소장 아카시가 왕산 선생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목숨만은 살리고자 회유하였다. 그러자 왕산 선생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 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를 막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카시 소장이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든 사람을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비록 한 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산 선생은 상 위에 있는 겉은 붉고 속은 푸른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언뜻 보면 붉은 빛인데, 안팎이 아울러 붉은 빛인가? 너희 나라가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크게 꾸짖었다.

또 일본 심문관이 "의병에 앞장 선 자가 누구이며 대장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이에 왕산 선생은 "앞장 선 자는 이토히로부미요,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하면서 "이토히로부미가 우리 나라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앞장 선 자가 이토히로부미다"라고 답하여 심문관의 말문을 닫게 하였다.

태풍전망대에서 휴전선을 바라보는 왕산 후손들. 왼쪽부터 허벽, 허윤 증손 부부 외증손녀 러시아 동포 기라리이샤, 미라, 외손 권영조씨
태풍전망대에서 휴전선을 바라보는 왕산 후손들. 왼쪽부터 허벽, 허윤 증손 부부 외증손녀 러시아 동포 기라리이샤, 미라, 외손 권영조씨 ⓒ 박도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정오 왕산 선생은 서대문 감옥이 생긴 후 최초로 교수대에 올랐다. 일본 중이 주문을 외우며 명복을 빌자 "충의로운 귀신은 저절로 하늘 나라에 오른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들 어찌 너희들의 천도에 의지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담담히 운명하셨다.

왕산의 옥사 후 구미 임은동 허씨 일족들은 고향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 밀정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1915년 만주로 야반 도주하다시피 망명길에 올랐다.

왕산 허위 의병부대의 주활동무대 연천 임진강
왕산 허위 의병부대의 주활동무대 연천 임진강 ⓒ 박도
몇 해 전 필자는 당시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장세윤 교수와 왕산 허위 선생의 임은동 생가와 후손들을 탐방하였다.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임은 허씨 10여 가구 중 허호씨만이 홀로 고향땅을 지켰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후손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연전에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손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만났더니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이 날 망우리 현장에서 만난 왕산 증손자 손녀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얼싸안고 눈물로 대화할 뿐이었다. 날마다 교통방송에 나오는 '왕산로'의 지명 유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왕산 선생과 동향인 필자도 중국에 가서 제대로 함자와 왕산로의 유래를 알았으니 다른 이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광복 60년이 다가오는 현 시점에도 여야 대표가 모두 친일파 후손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엊그제 망우리에서 본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만나는 장면이 떠올라 울고 싶은 마음을 이 글에 담아 보았다.

폐허가 된 구미시 임은동 왕산 생가 터
폐허가 된 구미시 임은동 왕산 생가 터 ⓒ 박도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투쟁의 등불"
금오산 도립공원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문'

▲ 왕산 허위 선생
ⓒ독립기념관
(아래는 금오산 도립공원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문>으로 필자가 다소 첨삭하였다...필자 주)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1896년 왜적은 날로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가니 선생은 책을 덮고 선비의 매운 서슬을 떨쳤다.

그해 3월에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왕명을 받들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1899년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으로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밝고 넓은 경륜을 펼쳤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받치기에는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그 후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아래 숨어서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들이 약속한 시간에 닿지 못하자 선생이 몸소 300여명의 결사대만 거느리고 동대문 밖(현 망우리)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였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1908년 경기도 연천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렸다는 말인가!

그해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 말았다. 선생은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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