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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일 19일 부안 읍내 상황. 부안 주민들은 당시 상황을 '민란'과 같았다고 기억한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지난 2003년 11월 19일 늦은 밤. <오마이뉴스> 편집국에는 부안 현장 취재기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왔다. "부안 읍내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부안예술회관이 화염에 휩싸였고 LPG 가스통이 폭발했다."

자정을 넘겨 상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새벽 2시경. 당시 작성된 데스크 칼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쟁터는 비단 이라크뿐만이 아니다. 민심이 떠난 정권은 그 앞날이 뻔하다. 이제 부안군민들을 편안케하라."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이 본격화된지 1년. 겉으로 드러난 부안의 모습은 '평안'하다. 당시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경찰과 맞섰던 군민들 대다수는 이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생업에 매진하고 있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와 침체된 지역경제, 인기리에 끝난 모 방송사 드라마가 이곳에서도 주요 화제다.

치열하게 싸웠던 핵폐기장 반대 투쟁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14일까지 진행된 부안영화제 기간 동안 만난 '부안 투쟁의 주역'들은 지난 1년간의 투쟁에 대해 "승리를 목전에 둔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과"라는 평가에서부터 "문제를 제대로 풀어가지 않으면 결국 지역이기주의의 발로로 치부될 수 있다"는 평가까지 다양한 의견을 보였다.

부안 투쟁의 주역으로부터 듣는 '지난 1년'

▲ 부안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 그는 부안이 적어도 환경문제에 있어서는 '동학 정신'처럼 영원히 회자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최근 평화유람단 활동을 벌이고 있는 문정현 신부는 "지난 1년의 투쟁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혁혁한 기념비적인 싸움"이었다며 "이는 온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기록될 만한 훌륭한 투쟁"이었다고 자평했다. 이러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부안 주민들이 흘린 소중한 피땀과 함께 주위 도움도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부안 사태가 악화 일로를 걷게된 가장 큰 책임은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정책 추진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문 신부는 "적어도 환경·반핵 운동에 있어서 부안의 의미는 동학혁명 정신처럼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정부가 결정한 정책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꿨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종성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이하 대책위) 집행위원장은 "지난 1년 투쟁 과정에서 부안군민들이 입었던 경제적 피해나 가정적인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한뒤 "그럼에도 부안 사람들은 그 이상의 정신적 자산을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그 예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자발적인 참여의식의 확대,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전 등이다. 김 위원장은 "길게 본다면 이런 역량들이 부안 발전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부안은 자연 파괴와 인간성 말상을 초래하는 개발 지상주의와 다른, 환경 친화적인 자치 모델을 실천해 나가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주민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린 지자체장에 대한 분노, 투명하지 않은 정부 정책 추진에 대한 불신 등으로 비롯된 핵폐기장 사태를 통해 부안 주민들은 '생명'과 '자치'를 화두로 하는 새로운 부안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 8월 13일 찾은 부안 성당 전경. 부안은 지금 주민과 노동자가 최대 지주가 되는 '르몽드식' 소유구조를 지닌 풀뿌리 언론 <부안독립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신중론 "부안 넘어선 대안 운동 펼쳐져야"

김종규 군수도 취임식 때는 '투명행정' 외쳐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김종규 현 부안군수에 대한 평가를 동반한다. 김 군수는 현재 부안에서 "핵종규 군수", "사탕 군수" 등으로 불리며 수난을 겪고 있지만, 2002년 취임 초만 해도 '참신한 도정' 시도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현 부안군청 행정계장(당시 기획부장)인 공무원이 작성했던 <오마이뉴스> 2002년 7월 22일자 기사 <"유리병처럼 투명한 군정 펼치겠다" - 부안군, 군수실 '투명유리'로 개조 화제>를 보면 김 군수는 "밀실행정을 없애기 위해 군수실 출입문을 유리문으로 바꾼" 의욕적인 인사로 소개된다.

김 군수는 취임식에서 "민선3기 부안군정은 유리병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군정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300만원을 들여 군수실 출입문을 교체하고 3만원짜리 플랫카드만 건 취임행사를 벌였다.

전주대총학생회장과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김 군수는 6·13 지방선거에서 프로바둑 기사 조남철의 고향인 부안을 '바둑의 메카'로 키우고, 인근 변산반도 등 관광지를 '친환경적'으로 개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린 부안 사태가 여전히 진행중이며, 향후 전개 방향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신중론도 적지 않았다.

김효중 대책위 교육부장은 "몇몇 분들은 부안 사태가 거의 마무리 상황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실감이 안난다"며 "여러가지 공론화 기구나 포럼 등을 통해 부안 상황이 호전될 거라고 믿는 기대 자체가 의문스럽다"고 밝혔다.

김 부장은 "최근 부안 상황을 보면 군민들 간의 갈등이 오히려 더 증폭되고 있다"며 "찬성쪽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반대쪽에는 과거처럼 똘똘 뭉치지 못해 매우 불안한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물밑 회유 작업은 계속 하면서 허울 좋게 평화적 해결만 강조하고 있는" 정부당국에 대한 불만도 높다고 김 부장은 전했다.

그는 "부안 사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며 "몇몇 분들은 아직 핵폐기장 문제도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대안에너지 타령이냐고 반발하지만, 에너지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자치를 이루기 위한 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5년 동안 부안에서 머물며 영상 작업을 펼쳐왔고 이번 '2004 부안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새만금, 핵폐기장 낳다>를 연출한 이강길 감독은 "핵폐기장 투쟁이 부안을 넘어선, 반핵을 넘어선 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그동안 부안이 이룩한 성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감독은 "부안 이외 지역에 핵폐기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안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현재 진행중인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부안주민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며 "이 모든 문제를 관통하고 있는 '개발 환상'에서 부안 주민들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작년 5월 계화도에서 홀로 새만금 갯벌 살리기 삼보일배에 나섰던 고은식씨.
ⓒ 참소리 제공

핵폐기장 막은 부안이 새만금 살릴 수 있을까

김 부장과 이 감독의 이런 지적에는 물론 "피해 당사자인 부안 사람들에게만 대안 마련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부안과 더불어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 모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부안에서는 핵폐기장 문제로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추진되고 있다. 문규현 신부는 "핵폐기장 투쟁 전에도 삼보일배 등을 통해 국민여론을 환기시켰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새만금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라며 "핵폐기장 투쟁을 통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몇몇 국책사업의 허구성을 직접 체험한 만큼 새만금 여론도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지난 5월 홀로 새만금 갯벌 살리기 삼보일배에 나섰던 개화도 어민 고은식(42)씨는 "여전히 간척사업 공사를 찬성하는 분들이 많지만 핵폐기장 싸움 이후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간척사업 중단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몰매 맞을 짓이었지만, 지금은 떳떳이 공사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변화"라고 고씨는 말한다.

기자가 부안에 머물던 13일 중앙대와 서울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환경동아리 '씨알' 학생들이 새만금 갯벌 체험장 공사를 돕고 있었다. 한반도 상공에서 한 시간당 수십 개의 유성을 볼 수 있다던 13일 새벽, 현장에 도착한 학생들은 조금씩 굳어가는 갯벌에 발을 묻으며 "핵폐기장을 막았던 부안이 새만금을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굵은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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