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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청 선생이 1959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아들 찬식씨의 안내로 구라파 여행 중 로마에서 찍은 사진.
야청 선생이 1959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아들 찬식씨의 안내로 구라파 여행 중 로마에서 찍은 사진. ⓒ 최찬식씨 제공
"아무리 생각해도 박정희는 무정한 인간이었다."

청구대학의 설립자 야청 최해청(77년 작고) 선생의 차남 찬식(77)씨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30년 넘게 청구대학 회복 운동을 벌이고 있는 최씨는 지난 67년 영남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사라진 선친과 청구대학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는 지난 97년 야청 선생의 유고인 <청구유언>, 일기와 편지,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청구증언>을 펴내기도 했다. <청구증언> 속에는 청구대학의 창학 과정과 시련기, 또 영남대학교의 탄생 과정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야청 선생이 1950년대부터 기록한 일기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도 하다.

<청구증언> 펴내며 외로운 싸움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선친이 설립한 청구대학 영어 강사로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슬하에 3남을 둔 야청 선생은 둘째인 그에게 청구대학과 관련한 제반사항을 의논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그는 주로 편지를 통해 선친과 학교와 관련한 의견을 교환한다. 1958년에 발표한 청구대학의 '교육정신'도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야청 선생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법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설립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내부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으로 학교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고뇌를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67년 청구대학이 사라질 쯤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선친은 무엇보다 청구대학의 정신과 이름이 영원히 남겨지길 바랬다"면서 "선친이 이후락에게 마지막까지 '청구공전만을 남긴다'는 약속을 지켜라고 요구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분노를 아직도 삭히지 못했다. 청구대학을 사실상 '강탈' 당하기 전까지 박정희의 태도와 그후 모습은 '너무나 이중적이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야청 선생 찾더니, 대학 빼앗을 땐 외면만"

"청구대학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박정희는 가끔씩 선친을 불렀다.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사회와 교육 분야에 대해 선친에게 자문을 구했다. 당시만해도 선친은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는 '혁명'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산 이은상이 박정희에게 청구대학 '진상'을 알린 후 박정희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선친은 단 한번이라도 박정희를 만나 청구대학의 진실을 알리고 싶어했지만 외면할 뿐이었다."


최씨는 당시 박정희의 태도 변화에 대해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박정희가 정말 무정한 짓을 했다"면서 "선친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만나 주지 않았다"고 가슴을 쳤다. 그는 "한 언론인이 야청선생을 위해 박정희에게 간청을 여 간청을 넣으니 박정희가 '그사람 내게 당신이라 하더라'며 고개를 돌린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박정희가 선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남대 탄생이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의해 주도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영남이라는 이름도 이후락 실장이 지었다는 말이 있다"면서 "대학의 강탈과 합병에서 실무는 이후락 실장이 맡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박정희가 '교주'로 돼 있는 영남대에 대해 박정희 '일가'들이 권리를 주장하는데 못마땅하다.

"도대체 박정희와 그의 일가들이 영남대를 위해 한 일이 뭔가. '상납'이라는 명목으로 강탈한 학교들을 합병하고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영남대를 세웠지 않나. 그런 박정희와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영남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이 대체 뭐가 있는가."

"박근혜씨 만나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표와 동생 박서영씨는 지난 88년 국정감사에서 대학비리와 관련해 일체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끝이 난 일"이라면서 "계속 그의 일가들이 (자리를)주장을 한다면 박근혜 대표를 만나 그들의 과오를 이야기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박근혜 대표의 친척을 통해 만남을 요청한 바도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 영남대 발전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는 반박했다.

"박정희가 영남대 발전을 위해 공헌한 것 아니냐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그러면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조선을 강탈했고,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그들의 필요에 의해 철도 건설하고 경제발전의 기틀을 잡았다고 독립을 원치 않을 수 있나. 바로 그런 이치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구대학의 '복원'을 기대하고 했던 그는 이번 만큼은 청구대학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

그는 "청구대학의 움씨라도 남기겠다던 선친처럼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청구의 이름과 그 정신을 되찾고 싶다"면서 "독립정신에 기초해 민족대학으로 성장했던 청구대학을 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 청구대학 명칭 회복과 청구대학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이사 참여 등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벌써 칠십을 훨씬 넘긴 나이. 하지만 그는 아직도 선친과 군사정권에 '뺏긴' 청구대학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한다.

"77년 선친이 돌아가실 때 제대로 눈을 감으셨겠나. 얼마나 억울한 마음이었을까. 벌써 청구대학이 사라진지 30년이 넘었다. 청구대학을 회복하는 일이 내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고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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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오마이뉴스(dg.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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