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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고개를 드니
- 산책시(散策詩) 7

덕수궁에 입장해서 보았다
대궐의 지붕과 저 처마는 얼마나 이중적인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그 지붕은 매우 다소곳하게 흘러내리는 선이지만
땅에서 한번 올려다보라, 이 거대한 처마는 하늘을 향해 바싹 고개를 쳐들고 있다, 하늘에선 보이지 않는다.

왕들은 저러한 구조에서 평안했다

(민음의 시 52 이문재 시집 <산책시편>에서)


올해 10년만에 찾아온 찜통더위를, 거리에서 노숙하면서 그것도 단식을 하면서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한 스님이 있습니다. 지율스님. 그는 천성산과 도롱뇽을 살리기 위하여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공사의 중단과 환경영향 재평가 실시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한 달이 넘게 단식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지율 스님
ⓒ 오마이뉴스 김태형
이미 지난 해 초와 가을에 똑같은 일로 각각 38일과 45일간 단식투쟁을 벌인 바 있어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드실 텐데도, 한여름 폭염 속에서 또 다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지율스님의 얼굴은 너무나 맑습니다. 그 맑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성심수녀원의 수녀님들께서 위문공연을 오셨습니다. 2년 전 길거리음악회에서 함께 했던 마음들을 노래로 풀어나갔습니다. 수녀님들이 부르신 노랫말처럼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이름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수녀님들께서는 2년 전 7월, 부산시청 앞에서 열렸던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음악회'에 함께 했던 마음을 청와대 앞에 심어놓고 가셨습니다.

"천성산의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단식 37일째를 맞던 8월 5일, 지율스님은 이렇게 바로 앞 청와대의 주인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수녀님들과 함께 부른 천성산의 노래는 청와대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고, 사랑의 이름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도 청와대의 굳게 잠긴 문을 열어제치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지율스님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이 너무 큰 때문일까요. 그러나 김선일씨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는 것을 보고는, 그렇게 이해하려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이 되고 나자,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초심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위 시에서 이문재 시인이 덕수궁을 거닐다가 대궐의 지붕과 처마의 이중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그 구조 안에서 평안했을 조선의 왕들을 상기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도 지금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있는 청와대의 지붕과 처마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하늘 모시듯 서민들의 말에 '다소곳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이제 청와대에 입성하고 나니 '고개를 바싹 쳐들고' 서민들이 살고 있는 땅은 쳐다볼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새로 출범한 제17대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상생의 정치'를 높이 내건 국회의사당의 지붕과 처마 밑에서, 새로 선출된 대다수의 국회의원들 역시 당리당략을 '다소곳하게' 따르고 있을 뿐, 국민들의 진정한 목소리에는 '바싹 고개를 쳐들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중적 구조 안에서 청와대의 대통령과 국회의사당의 국회의원들은 평안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나라 살림을 맡긴 국민들은 하루하루가 고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율스님이 똑같은 일로 벌써 세 번씩이나 단식투쟁에 나서게 된 것도, 이처럼 처음과 나중이 다른 그들의 속성을 모른 채 너무나 순진하게 그들의 말을 믿은 탓이겠지요.

그러나 내일(7일) 저녁 5시부터, 덕수궁과 청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집회를 계획하고 있는 '도롱뇽의 친구들'은 이제 다시는 그들에게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서, 탄핵철회의 외침과 함께 들었던 촛불 대신에 이제는 '배신'이라는 꽃말을 지닌 다알리아 꽃을 들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알리아는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아름답게 합니다"라는 꽃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더군요. 이것을 보면, 아마도 '도롱뇽의 친구들'은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씨처럼 아직 꺼지지 않은 믿음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율스님이 말한 것처럼 "원래 불씨란 커지지 않고 이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저녁 집회에 참석한다면 지율스님과 '도롱뇽의 친구들'의 희망과 믿음의 불씨가 좀더 환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집회에 모여서,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다알리아의 꽃말을 '배신'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쁨'으로 변모시키기를 빌어봅니다. 그래서 초심을 잃고 이중적 구조의 평안함에 안주해 버린 청와대의 주인이 굳게 닫힌 그 문을 열고 걸어 나와, 사람들의 말과 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는 천성산 도롱뇽의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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