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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실러 가족. 왼쪽부터 아버지 켄, 아들 드루, 딸 앨리, 어머니 멀린다. 집 앞에 걸려있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한국계 미국인’ 집안 임을 알려주고 있다.
ⓒ 조명신
앤드루 박 실러(Andrew Park Schiller). 한국이름 박현우. 17년 전인 1986년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올해가 두 번째.

지난 7월 8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미국의 딜런 인터내셔날과 한국의 동방사회복지회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는 '모국방문단'의 일원이 되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 동아일보 6월 24일자 A21면에 실린 기사
ⓒ 동아일보 PDF
지난 1999년 여름, 첫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켄(Ken·54), 어머니 멀린다(Melinda·52), 그리고 여동생 알리(Ally 한국명 김설희·14) 등 가족 모두와 함께였다.

지난 방문이 한국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면, 올해의 방문은 드루(가족들은 앤드루를 그렇게 부른다)의 생모를 찾기 위함이었다. 입양기관의 규정상 13살이 넘어야만 비로소 생모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올 여름에 실러 가족이 함께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었지만, 드루가 생모를 찾기로 한 것은 갑자기 결정된 일이었다. 한국행을 몇 주 앞두고 실러씨 부부가 자녀들에게 물었다. 생모를 찾아보지 않겠느냐고. 알리는 아직은 싫다고 했고 드루는 며칠 생각한 끝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입양기관에 통보를 하는 과정에서 드루가 보이스카우트 최고의 영예인 '이글 스카우트'인 것이 알려졌고 그 소식은 한국의 언론에까지 알려져 "생모 찾아온 최고 보이스카우트"로 소개되기도 했다. 드루는 미국 전체 보이스카우트 가운데 단 2%만이 선발된다는 '이글 스카우트'일 뿐만 아니라 '우수학생협회(National Honor Society)'의 정식회원이기도 하다.

드루가 모국방문단으로 2주간 한국방문을 마치던 날 생모를 만났다(<동아일보> 6월 24일자 상자기사 참조).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애태웠던 그의 바람이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꿈과 같았던 1시간 남짓의 짧은 상봉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드루와 가족들을 텍사스주 칼리빌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인터뷰에는 가족들이 모두 참석했다.

- 우선 가족들을 소개해 달라. 자녀들은 언제 입양하셨는지.
: "우리가 펜실바니아에 살던 1986년, 가톨릭 입양기관을 통해 생후 3개월 반이던 드루를 입양했다. 그후 1989년 아내 직장을 따라 이 지역으로 온 이후 줄곧 이곳 칼리빌에 살고 있다. 알리는 1990년에 입양했다. 당시 생후 7개월이었다.

나는 작년 3월부터 'Logo Matters'라는, 로고가 새겨진 옷(Identity Apparel)을 생산하는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멀린다는 휴대폰 회사인 버라이존(Verizon)에서 인적자원부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 조명신
- 들어오다 보니 집 앞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걸려 있던데, 특별히 오늘 꽂아 놓은 것인가?
: "오늘만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걸려 있다. 우리 집이 바로 '한국계 미국인' 가정 아닌가. 우리 가족이 한국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늘 자랑스럽다. 한국의 전통 공예나 음식 등, 다 좋아한다. 어젯밤에도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었다."(웃음)

- 이번 한국 방문은 어땠는가?
: "참 좋았다. 2주가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사람들은 친절했고 어디에서건 우리를 도와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입양부모라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사람들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여행하기에 편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서울, 부산, 경주 등의 도시와 DMZ 등을 방문했고, 입양기관 부설로 평택에 있는 미혼모의 집과 장애인 교육시설 등을 둘러보았다. 또한 요리학교에서 한국음식을 배웠고 서울의 아름다운 궁궐들을 여러 곳 방문했다."

알리 :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쇼핑이 즐거웠다."

- 이번 여행 전부터 생모를 만날 준비를 했나?
드루 : "생모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만날 준비가 돼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 만난다고 해도 결코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번 한국방문에서 드루는 입양 직전 자신을 돌봐주었던 위탁모 김옥희(70)씨(사진 중앙)를 만나기도 했다.
ⓒ 켄 실러
멀린다 : "입양아가 성장해서 생모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 본인이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입양기관에서 20건의 사례연구자료(Case Study)를 보내준다. 그 안에는 친가족 만남을 통해 느꼈던 입양인들의 사례가 들어 있고 친가족찾는 과정에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에 대해 읽을 자료들이 들어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입양아가 생모와의 만남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실 갑작스런 결정이었기 때문에 우리들도 준비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찾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 입양인들도 있고 우리에게는 이번이 첫 시도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동안 아이들을 찍은 사진이나 선물 같은 것을 준비해 가야 하는데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 "한국에서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었는데, 우리는 부모로서 드루나 알리가 생모를 만나게 될 때를 생각해 오고 있다. 본인들이 생모를 만나기 원한다면 적극 지원하기로 입양 당시부터 생각했었다."

- 생모를 만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는가?
드루 : "한국과 이곳은 시차가 14시간 나는데, 지금 여기가 몇 시니까 한국은 몇 시고, 이 시간에는 무엇을 하고 계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글쎄, 생각은 복잡하지만 내가 지금 달라진 것은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멀린다 : "드루가 생모를 만나던 날, 생모가 3장짜리 편지를 가지고 왔다.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쓴 편지였다. 그 편지는 한국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입양기관에 번역을 부탁했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편지가 얼마 전에 집으로 왔고 그 밀봉된 편지를 드루에게 전해 주었다. 드루 외에는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른다.

생모가 자기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으니 만큼 우리도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녀의 연락처는 우리도 모르고 한국에 있는 입양기관만이 알고 있다. 앞으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는데, 우리가 미국의 입양기관으로 편지를 보내면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의 입양기관으로 보내고 거기에서 드루의 생모에게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실러 가족은 돌아오는 길에 미국으로 입양되는 두 명의 간난아이들과 같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동안은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면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이해하게 되어 기쁘다"고 멀린다가 인터뷰 끝에 덧붙였다.

드루는 조만간 생모에게 답장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직 그는 힘겨워했지만 그 어려움을 잘 딛고 일어설 만큼 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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