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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세종이, 해강이, 솔강이가 다리 밑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
한글이, 세종이, 해강이, 솔강이가 다리 밑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 ⓒ 김규환
동네 형들을 따라 꼴이나 뒷골로 나무를 베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초등학교 1, 2학년은 수난 아닌 괴상한 일을 당하며 마냥 신기해 했다. 중고등학생 형들은 해야 할 일은 팽개치고 뒤따라온 강아지 복실이 물건을 만지작거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하얀 뜨물이 팍 쏟아져 나온다. 1분여 지난 상황에서 그처럼 돼 버린다.

아직 수컷으로서 성징이 나타나려면 상당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강아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생전 처음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고는 주위를 한바퀴 돌고 다시 주인 옆으로 온다. 이 때 주인은 조바심을 부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

곧이어 제일 선배인 한 형은 자신의 그걸 주물럭주물럭 만지작거리다가 앞뒤 피스톤 작용을 해대면서 대여섯 명이 차례대로 소위 그 짓(?)을 해대는데 울지 않으면 초등학교 1~2학년도 영락없이 꼬추(?)를 내놓아야 한다.

동정지 팽나무 아래서 바라본 저수지. 이 먼 길을 제 형은 왕복으로 왔다 가는 바람에 아버지께 욕을 무척 얻어 먹었답니다. 한쪽 방향이 1.5km 가량됩니다.
동정지 팽나무 아래서 바라본 저수지. 이 먼 길을 제 형은 왕복으로 왔다 가는 바람에 아버지께 욕을 무척 얻어 먹었답니다. 한쪽 방향이 1.5km 가량됩니다. ⓒ 김규환
산간 벽지 남자들 세상이 그랬다. 그렇게 2~3년을 지냈다. 5학년이 되자 마을에 대형 저수지가 만들어지며 고향 산천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난포 구멍을 뚫어 화약을 넣고 폭파를 해서 산을 깎아 없앴다. 대형 트럭도 30여대가 넘었다.

문전옥답이랄 것도 없이 천수답 일색인지라 걸핏하면 모내기도 마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어 놓아도 논바닥이 쫙쫙 갈라지는 농사 짓기 험난한 산골 마을에 댐에 버금가는 농업용수를 저장하는 대형 수원지를 막는다는 건 마을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방촌으로 가는 골짜기인 소로골과 차일봉쪽 극락으로 가는 두 골짜기는 U자와 V자의 중간 형태다. 농토가 부족해 늘 식량난에 허덕였던 빨치산의 고장 백아산 인근에서 알아 주는 골짜기 마을에서 그 두 골짜기 논밭을 덜어내면 농토의 3할이나 버리는 셈이었지만 물 걱정 없이 다수확의 기쁨을 얻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보상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리조합(水利組合)이 만들어지면 고액의 물세를 향후 30년 동안이나 물어야 하는데도 순박한 양지마을 사람들은 반대 한번 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하며 날품팔이 시대를 맞이했다. 동네 앞길은 트럭이 지나다니며 먼지를 일으켜 평화로움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빨래 하나 제대로 널 수 없는 기간이 3년간 지속되었다.

극락골 선산이 있고 차일봉이 있는데 차일봉 갈대밭엔 무수히도 헬기가 날았고 낙하산이 둥둥 떠다녔다.
극락골 선산이 있고 차일봉이 있는데 차일봉 갈대밭엔 무수히도 헬기가 날았고 낙하산이 둥둥 떠다녔다. ⓒ 김규환
전기가 들어오고 3년째 되던 여름엔 거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물을 가두는 일만 남았지만 농사가 한창 때인지라 가을철로 늦춰 잡았을 뿐이었다. 우린 그 때를 기다렸다. 둑 안쪽은 곳곳이 긁어 놓은 흙 구덩이 사이사이가 방죽이 되었고 물이 고였다.

우리 마을에서 둑을 바라보면 있던 산이 없어지고 드넓던 들이 없어 전혀 다른 마을에 온 듯 그 높이가 소양강댐 높이만큼이나 높다. 둑 길이는 100m밖에 안 되는데도 어찌나 높아 보이던지 괴물 같은 60m 높이의 인공 건조물은 시골뜨기들에겐 중압감으로 다가왔을 터다.

그러면서 그 안에 내 잔뼈를 굵게 해 줬던 수많은 추억거리가 서서히 사라질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진기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지었던 소로골 논과 밭, 비까리, 평까끔 논, 그리고 골짜기 골짜기를 따라 나무하러 갔던 산길 초입이 있다.

폭은 좁지만 두 골짜기 안엔 미꾸라지 피리, 붕어, 메기, 쉬리가 있었다. 징게미, 새비(토하), 가재 천국이었다. 개구리와 두꺼비 그리고 온갖 뱀이 사람이 다니기 힘들도록 득실댔다. 여치, 메뚜기, 풀무치, 방아깨비, 베짱이 길 오가는데 심심치 않게 노래 불러 줬는데 그 아까운 것들을 모두 잃게 될 줄이야.

뿐이던가. 돌 하나 내 손때가 묻었고 바윗돌은 한 번 이상씩은 어루만져 줬을 게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는 내 작은 눈에 선명히 박혔다. 몇 미터 눈을 감고 걸어도 넘어지지 않았고 꼭 오르막길 그 자리엔 버드나무가 있었고 팽나무가 있었다. 뽕나무는 오디를 선물했다.

둑이 만들어진 그 자리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쯤까지는 거기도 삼거리라고 열 집도 안 되는 방촌마을을 두고도 주막이 있었다. 고려 시대 적에나 나올 법한 그런 주막 말이다. 그래 내 과거의 상당 부분-절반 이상은 수몰되고 말았다. 굽이굽이 도랑 따라 걷다 보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던 아련한 추억을 저수지가 모두 곧 삼킬 태세였다.

저수지 아래 경지정리가 안된 논과 우리 마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저수지 아래 경지정리가 안된 논과 우리 마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 김규환
6학년이던 우리 또래만큼 그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는 연배도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가 보자. 댐 안쪽은 물이 곳곳에 고여 있다. 마저 퍼내지 못한 흙더미도 군데군데 널려 있다.

범생이 육남이만 빼고 성호, 해섭, 병문, 병섭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에 5학년 세 명이 간혹 끼었다. 남자 아이들은 70년대 말을 기준으로 서울로 이사를 해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마을 아래쪽은 가 봐야 흙탕물이라 흐릿하여 머리가 벌어지거나 뱃가죽이 쫘악 갈라지는 경험을 했던 우리는 더 이상 밑으로 가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우린 수건을 하나씩 들고 한 놈만 세수 비누 곽을 들고 집을 나선다. 바깥쪽은 겉을 흙으로 덮었지만 안쪽은 석벽을 쌓았다. 물이 찰 곳에 비스듬히 올라온 석축 위에 옷을 벗어 놓고 우린 넘어지지 않게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발바닥이 해를 머금어 무척 뜨겁다.

아래에 이르러 체조를 한번 늘어지게 하고는 세수 먼저 하고 그 다음 발을 담그고 무릎과 아랫도리에 물을 찍어 발랐다. 마지막으로 가슴팍에 물을 묻혀 물귀신과 생이별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수행했다. 유유히 깊이 4~5m나 되는 웅덩이를 헤엄으로 지나 시멘트 수로 앞에 이르렀다.

멀리서 바라본 저수지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주변산
멀리서 바라본 저수지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주변산 ⓒ 김규환
저 멀리서 “쏴-” 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실려 온 비릿한 시멘트 냄새가 풍겨 왔다. 물이 정강이보다 조금 많았으나 장딴지까지는 차오르지 않았다. 벌써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째 이곳으로 몰려왔는지 모른다.

우린 첫날엔 2m 40cm 높이의 수로 내부-바닥만 평평할 뿐 원을 반으로 나눠 놓은 모양인 수로를 따라 아래쪽으로 서서히 걸으며 탐색을 했다. 탐색전에는 플래시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벽에 바짝 붙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못이나 철사가 배나 옆구리, 손바닥을 긁어 놓을 수 있으니 가운데 통로로만 따라 조심히 내려갔다. 간혹 물이 높은 곳에선 자맥질을 해가며 내려간다. 마치 개구리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처럼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1/3 쯤 내려가자 현저히 어두워졌다. 처음 가보는 알 수 없는 길인지라 아이들은 둘씩 손을 잡고 걸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암흑 천지다. 낮은 목소리에도 소리가 울리니 서로 알아듣지를 못한다. 서늘했다. 오싹했다. 무서움을 숨기려고 아이들은 큰 소리를 질러보았다. 구부러진 반대편 입구까지는 어림잡아 150m 가량 되었다. 다시 환한 빛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하류에서 온몸에 모래를 찍어 발랐다. 수로 위로 쏜살같이 달렸다. “야-” 후배들까지 열명이 수문 위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첨벙첨벙 뛰었다. 그렇게 하루에 오간 것이 적어도 예닐곱 번은 되었다.

방촌 뒤편은 곡성군 겸면, 삼기면 일대다. 물 오른쪽에 우리 논과 밭이 있었다. 소로골은 여기 안에 있다.
방촌 뒤편은 곡성군 겸면, 삼기면 일대다. 물 오른쪽에 우리 논과 밭이 있었다. 소로골은 여기 안에 있다. ⓒ 김규환
지치면 헤엄을 쳐서 아직 물이 차지 않은 석축(石築)으로 나온다. 비스듬한 돌에 간신히 의지하여 누워서 몸을 말리며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 장난기가 꿈틀거린다. 꼼지락꼼지락 맨살을 문질러가며 때를 벗기다가 이내 그 곳에 손이 가서는 주물럭주물럭 거리는데 한 놈이 먼저 제안을 했다.

작년 가을의 백아산 서사면
작년 가을의 백아산 서사면 ⓒ 김규환
“야! 이렇게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갖고 놀면 하얀 뜨물이 나온다. 우리 누가 먼처 나오는가 내기할까?”

몇 년간의 세월이 흘러 나는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었지만 최근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고 있는 그 애가 부러웠다. 그래도 자존심과 부끄러움 그리고 어른들께 들키면 욕먹을까 봐 “뭔 소리, 얌마!”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다들 골목대장 아이의 제안에 자연포경도 안된 제들 물건을 잡고 손을 마구 움직여 댄다. 서서하는 아이도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혼이 나간 듯 일등을 하기 위해 자기 몸을 혹사를 시키더니 한 놈이 “읔!”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키는 제일 작았지만 몇 번 해 본 솜씨였다. 그래도 물이 찰 저수지 아래쪽을 향해 나란히 앉은 아이들은 일이 끝날 때까지 멈추질 않았다. 나도 중간쯤 순서로 일을 끝마쳤다. 생전 처음 겪은 몸이 굳는 경험이었다.

한 달여 방학 동안 그 자리에 가면 어김없이 그 행위는 지속되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두 달 후 물을 막았기 때문에 우린 더 이상 그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사실 시골 아이들이 끝없이 되바라진 건 그들만의 아지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회지에서 학교 나온 선배들 영향이 컸다. 자위(自慰). 스스로 자신을 위로한다는 건가? 부뚜막에 일찍 올라가 한 동안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한 성장기의 추억이었다.

어울리다 보면 남자 아이들은 쉽게 그런 유혹에 빠지곤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나중엔 내가 다닌 고등학교 기숙사에선 친구들끼리 그 짓을 전수받고 사사하느라 또 한번 바쁜 철을 보내고 있었다.

저수지 위에서 바라본 빨치산의 고장 백아산. 구름에 가린 제일 높은 곳이 상봉이고 움푹 패인 오른쪽이 마당바위다. 실제보면 그 즈음에서 두 갈래 맥이 있는데 마당바위에는 아무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저수지 위에서 바라본 빨치산의 고장 백아산. 구름에 가린 제일 높은 곳이 상봉이고 움푹 패인 오른쪽이 마당바위다. 실제보면 그 즈음에서 두 갈래 맥이 있는데 마당바위에는 아무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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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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