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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남국의 태양 밑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마라도 주민 조청기(38)씨. 옆에서 동료인 김정애(35)씨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뜨거운 남국의 태양 밑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마라도 주민 조청기(38)씨. 옆에서 동료인 김정애(35)씨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 천선채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그런 줄 알았다. 제주도 바닷가 마을 골목을 이리저리 돌더니 결국 다시 원래의 해안도로로 올라선다.

안간힘을 쓰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 언덕에 올라서는 나를 힐끔 뒤돌아 본 동료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니고 힘들게 쫓아가는 나를 놀리려는 심보다.

멀리 쪽빛 바다 풍경이 눈가에 흐르는 땀에 비쳐 찝찔한 짠맛처럼 느껴진다. 부아가 난다. 그러면서도 또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다. 낭만적으로 기대했던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 자전거 여행과 영 거리가 멀다. 아예 극기 훈련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어제(21일)는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몸은 파김치가 됐는데 오늘(22일)은 새벽부터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체력을 아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멋진 제주도 풍경을 보면서도 몸의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다른 관광지는 그냥 지나치면서도 해수욕장만은 꼭꼭 챙겼다. 이호, 곽지, 협재 해수욕장 등을 지나칠 때마다 달려가 풍덩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푸른 하늘, 깨끗한 모래, 밀려오는 파도, 꿈에 그리는 낭만적 요소는 다 갖췄다.

멋진 아가씨와 우연한 조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실제 그런 영화 장면이 나에게 온다한들 이 모든 멋진 것들을 다 감당할 수 없어 오히려 당황스러울 것 같다. 약간 풀어진 채, 40대 남자 둘이 폼 잡고 달려가는 자전거 여행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소중하다.

바닷가 정자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쉬고 있는 모습이 여행객인 줄 알았더니 이 곳 주민들이었다. 육지로 나가 살기 싫다는 어느 분 말씀에 이구동성 맞장구치는 주민들 모습에서 제주도 삶의 풍경이 묻어 나온다.

어제 한라산 등반할 때 동행했던 제주시에 사신다는 아주머니 두 분이 말하는 한라산과 바다 얘기는 넘쳐흐르는 흙과 바람에 대한 사랑 이야기였다. 언제 자연이 인간 보고 보호하고 보존해 달라고 하였는가. 이 분들처럼 한라산 보고 바닷바람 쐬며 그냥 살면 되는 것을 우리는 곳곳에 자연 보호 간판을 세워 놓고 자연을 위하는 냥 착각을 계속하고 있다.

이정표가 애월읍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 준다. 오르막보다도 앞에서 부는 바람을 헤치고 나가기가 더 힘들다.

물을 마시러 들른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어린이가 부서진 나침반을 보여 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물을 마시러 들른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어린이가 부서진 나침반을 보여 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 천선채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고 하더니 이 정도 바람은 기본이라고 잠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려고 들어간 농협의 직원이 바깥 태극기 날리는 것을 보며 말해준다.

바람, 아이스크림, 40대 남자 둘, 사이클, 이것들이 그 직원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궁금하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며 슬쩍 건너다보는 그의 모습에 우리 행색이 어떤지 짐작이 가게 한다.

제주도 해안선 둘레는 253km이고 일주도로는 182km라고 한다. 한림을 지나면서 몹시 힘들어 진다. 미세한 오르막 도로도 앞에서 불어오는 센 바람과 함께 엄청난 힘의 크기로 느껴진다.

오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젊은 친구들 몇 팀도 제각각 풀어져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함께 가고 있는 동료는 만만찮은 체력의 소유자다. 그는 작년 서울에서 있었던 모 신문사 주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를 따라가기만 해도 나는 본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곽지 해수욕장 이후 줄곧 같은 속도로 달려 왔던 대학생 팀과 협재 해수욕장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한 친구는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저 아저씨들도 가는데 왜 못 가느냐고 우리를 비교 대상으로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 결국 그들은 남기로 결정을 했다.

우리는 오늘 서귀포까지 간다고 하니 아예 질리는 모양이다. 동료가 나를 가리키며, 이 아저씨 수영 2km 쉬지 않고 한다고 하니 젊은 친구들 입을 쩍 벌린다. 나도 저만치 달려가는 동료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마라톤 풀코스 완주한 사람이라고 하니 이 친구들 벌린 입에 눈까지 크게 뜬다. 그러면 그렇지 하며 자신들 결정에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체력보다는 이 순간 집착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평소 일에 대한 집착과 스트레스가 동료나 나나 더욱 달리는 일에 빠져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깔리고 더 이상 자전거 갓길이 없는 곳을 달리기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시쯤에 대정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서귀포를 약 40km 남겨 놓은 지점이다. 오늘 서귀포까지 가야 하는데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동료가 내일 오후 8시에 제주시에서 사람 만날 약속을 해 놓은 상태다.

1박 2일로 제주도를 돌아 원점인 제주시로 돌아가기에는 일정과 체력상 무리가 따른다. 내일은 좀 느긋하게 여행하기로 다시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아무런 집착 없이 여유를 갖고 싶다.

아예 계획을 바꿔 마라도를 다녀오고 서귀포까지만 자전거로 간 뒤 버스로 제주시로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은 좀 사진도 찍고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있을 듯하다.

야트막한 송악산 모습과 그 밑에 줄지어 파여 있는 동굴들(왼쪽). 동굴 위에 형성되어 있는 퇴적  지층의 모습.
야트막한 송악산 모습과 그 밑에 줄지어 파여 있는 동굴들(왼쪽). 동굴 위에 형성되어 있는 퇴적 지층의 모습. ⓒ 천선채
다음날(23일) 마라도 행 배가 뜨는 송악산 부둣가에 도착하니 정말 경치가 좋다. 짙푸른 바다와 야트막한 송악산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

송악산과 바다가 만나는 절벽 밑으로 여러 개의 동굴이 보이는 데 일본군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군과의 일전에 대비해 만든 인조 동굴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주변 매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들으니 여기 동굴에서 드라마 ‘대장금’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구석기 시대 사람과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화석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몇 달 전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던 바로 그 화석 발견지인 것이다. 마라도를 보고 온 뒤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꽤 많은 여행객이 배에 오른다.

국토 최남단임을 나타내고 있는 표석
국토 최남단임을 나타내고 있는 표석 ⓒ 천선채
파도가 제법 세다. 뱃전을 때리며 밀려나는 파도가 승객들의 즐거운 비명소리와 함께 포말이 되어 흩어진다.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으로 위도가 북위 33도이다. 국토의 가장 남쪽이라는 사실이 훌륭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가장 끝, 혹은 가장 높은 곳이라는 것에 막연한 의미를 부여한다.

대한민국 가장 남쪽 섬, 그 섬에서도 가장 남쪽 바닷가 바위에 올라서고 보니 새삼 내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진다. 대한민국 영토에서 내가 지금 가장 남쪽에 서있는 셈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장군 바위에 ‘나 여기 왔다 간다’라고 마음속으로 새겨 넣었다. 역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학교라 할 가파 초등학교 마라분교 앞에 멋진 이정표가 시선을 끈다.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에 어울리는 이정표. 마라분교 어린이들은 이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에 어울리는 이정표. 마라분교 어린이들은 이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 천선채
마라도에서 백두산까지 1013km, 상하이까지 661km. 이왕이면 여기에 우리나라 최북단인 유포진과 동쪽 끝 독도, 서쪽 끝인 평안도의 마안도까지의 거리도 함께 나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국토의 4극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웬 자장면 경쟁이 그렇게 심한지 TV 광고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광고판이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커 보인다.

섬 둘레가 4km 정도라 자전거를 타고 돌기가 안성맞춤이다. 강렬하게 내리 쬐는 남국의 태양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다투어 섬 언덕 위로 자전거를 밟아 오른다. 2인용 자전거를 타고 풀밭 위를 달려가며 부부들이 주고받는 웃음소리가 참 행복해 보인다.

마라도에서 주민 김정애씨가 자전거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다(왼쪽).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초원 위를 달리는 부부들.
마라도에서 주민 김정애씨가 자전거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다(왼쪽).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초원 위를 달리는 부부들. ⓒ 천선채
자전거를 빌려주는 일을 하는 젊은 사람 둘이 섬에서 가장 바빠 보인다. 바닷가 초원 위에서 그냥 주저앉아 자전거를 고치고, 빌려주고 하는 일이 좋아 보여 몇 마디 물어 보았다.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고 하니, 얼마냐고 물어보고는 자전거를 타지 않을 때라고 한다. 또 탈 줄도 모르면서 우기다가 넘어져 다치고 자전거가 고장 나면 정말 속상하다고 한다.

또 소금기 바람이 강해서 새 자전거라고 해도 1년이면 녹슬고 망가진다고 한다. 그래선지 온통 자전거가 비닐을 덮어쓰고 있던지 아니면 고장 난 것이 많아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막상 삶의 현장은 어디든지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는 법이다.

여행을 같이하고 있는 동료가 마라도에서 자유인 임을 만끽하고 있다(왼쪽). 백록담에서 내려 오던 중의 필자 모습.
여행을 같이하고 있는 동료가 마라도에서 자유인 임을 만끽하고 있다(왼쪽). 백록담에서 내려 오던 중의 필자 모습. ⓒ 천선채
송악산 항구로 되돌아와 바닷가 인조 동굴 주변을 살펴보고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우선 이 동굴들을 파낸 곳이 암석이 아니고 엄청난 퇴적 지층이라는 사실이다. 나뭇가지로 벽을 긁어내니 쉽게 파진다. 그러니 여러 개의 동굴을 파내는 것이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제주도 화산 지역에 이렇게 거대한 퇴적지층이 형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제주도는 용암 분출 지역이고 큰 강물이나 하천도 없으니 이 정도 큰 규모의 퇴적 지층이 만들어지기가 어려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날 저녁 제주시에서 송악산에 대한 기사를 썼던 모 신문사 제주도 주재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다른 지질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지질 연구의 대표적인 표본 지역 중의 하나가 이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또 얼마 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던 구석기 시대 사람과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지역이 있다. 그러나 보도 이후 중요 문화재 천연기념물 보호 지역으로 가지정되어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이곳 해안지역은 송악산과 산방굴사 사이의 야트막한 소나무 숲이 이어지는 천혜의 자연 환경이다.

화석 발견지에 세워진 안내판 사진(왼쪽). 화석 발견지 주변에서 말이 풀을 뜯고 있다.
화석 발견지에 세워진 안내판 사진(왼쪽). 화석 발견지 주변에서 말이 풀을 뜯고 있다. ⓒ 천선채
송악산에는 지금도 일본군이 지은 비행장 격납고 시설이 남아 있고 또 이곳 화석 발견지 주위에는 미군이 비행장 만들 계획을 세웠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항상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그놈의 파괴 본능이 문제다.

그 옛날 구석기인들이 이곳 바닷가에서 했을 듯한, 육지와 바다를 들고 나는 뜀박질을 나도 해보았다. 깊이 들어가 파도도 타보았다. 해안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동료를 바라보며 그를 돌멩이로 조개껍질을 깨는 구석기인으로 상상해 보는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기도 한다.

서귀포까지의 여정도 만만치가 않다. 산방굴사에 이르는 오르막 도로는 정말 숨이 꼴깍 넘어 간다. 그래도 오기로 버티며 자전거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산방산에서 바라 본 송악산의 모습이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산방산에서 바라 본 송악산의 모습이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 천선채
중문단지를 거쳐 서귀포에 도착하니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와서야 자전거 앞뒤 브레이크 장치가 고장 난다. 버스에 자전거와 몸을 싣고 보니 온 몸이 땀에 절고 잠이 쏟아진다. 목표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달렸다. 제주도의 나머지 반이 또 언제 갑자기 우리를 유혹해 이곳으로 달려오게 할지 모를 일이다.

원래 이 여행은 나로서는 전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일주일 이상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 마당에 동료가 제주도로 휴가를 갔다고 하기에 ‘참 날 잘 골랐다’하고 속을 긁으려고 전화를 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오히려 맑은 하늘에 짙푸른 바닷가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고 하면서 빨리 오라고 유혹을 하니 내가 되레 안달이 나 모든 것을 미뤄놓고 달려 왔던 것이다. 계획에도 없었고 애지중지 준비물을 챙기느라 고민도 없었기에 그냥 닥치는 대로 더 마음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졸지에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준 아내와 직장 동료들, 그리고 나를 멋지게 유혹해준 동료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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