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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 류재년
일천 류재년 ⓒ 전영준
이 학원 류재년(柳在年) 원장이 서예와 서각에 탁월한 조예를 지니고 있는 예인(藝人)이라는 것은 이 분야에 있는 이들은 다 알지만 그가 어떤 경지에 있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는 류 원장 자신이 이녁의 예술 활동을 세상에 드러내 놓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요즈음 세상인심이 곧장 돈이 되는 일이 아니면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겠다.

어쩌면 그의 이름 석자 뒤에 붙어있는 직함들이 그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단법인 전국자동차전문학원연합회 수석부회장’, ‘대우자동차전문학원 원장’, ‘양산중앙로타리클럽 회장’. 그의 이름에는 여러 개의 꼬리표가 달려있다. 이런 그가 붓을 잡게 된 연유를 물었다.

“은행지점장이셨던 선친께서 고서화들을 많이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선친이 친구 분들과 고서화를 감상하시고 해석하시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인사 ‘일타 스님’을 만나다

그는 일찍부터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썰미를 길러왔다. 그러나 그가 손수 창작에 전념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1979년, 그의 나이 서른 셋. 그가 경남 합천에서 자동차학원을 경영하던 때였다. 어느 날 합천해인사로 ‘일타 스님’을 만나러 갔다.

당시 해인사 해인총림 율주를 역임하고 있던 일타 스님은 일찍이 세속과 관련된 사람노릇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 결심하며, 오른손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임으로써 참회 의식의 극치인 소지공양(燒指供養)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유명한 스님이다.

손바닥으로 붓대를 쥐고 쓰는 악필(握筆)로 특이한 필법을 구사하는 그 일타 스님을 찾아간 청년 류재년은 대뜸 이 큰스님께 청했다.

“제가 추사의 작품이나 대원군의 난 등을 다소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스님의 글 한필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스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오늘은 붓 잡기도 싫고, 글 쓸 마음도 없네.”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그는 “그럼 부탁드린 것도 없도록 합시다”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길로 곧장 벼루와 붓을 장만했다.

그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스무 다섯 해에 이르러 나름대로 경륜을 이룬 그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사사하지 않고 애오라지 홀로 글쓰기에 정진했다고는 하나 따지고 보면 일타 스님이 그의 스승인 셈이라고 하겠다.

서예에 몰두하고 있는 류재년
서예에 몰두하고 있는 류재년 ⓒ 전영준
나중에 양산에 와서 4H 후원회 활동을 하면서 통도사 ‘월하 스님’과 같이 작품전시회를 연 인연이 되었다. 월하 스님이 지난해 12월, 입적하시기 전까지 그는 월하 스님과의 깊은 교류를 가지기도 했다. 그가 서화작품에 쓰는 아호 일천(一泉)도 바로 월하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일천 류재년이 각(刻)과 인연을 맺은 것은 김해에서 한 기인을 만난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무유선생으로 알려진 그 기인은 4대 종교를 두루 논할 만큼 학덕을 겸비한 분이셨는데, 그이로부터 꼬박 사흘간 각을 배웠습니다.”

농사짓는 농부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그는 글씨와 마찬가지 각 또한 홀로 공부했다. 한 해 동안에 130점이나 작품을 제작했다니 그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만하다. 그처럼 스스로 연구하고 개발하기를 거듭한 끝에 유리와 도자기, 타일 등에 각을 하는 것으로 그는 이 분야에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그에게 도대체 글은 무엇이며 각은 또 무엇일까?

“일상에서 쉽게 느껴보지 못하는 것을 좋은 글귀를 통해 새삼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이를테면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고나 할까요.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글씨를 통해 훈계하고 가르침으로써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각은 작품에 따라 한달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다 완성하고 나면 마치 농사짓는 농부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그리고 마침내 거두어들이는 과정. 작품도 공력이 많이 드는 만큼 그에 대한 정도 더욱 깊어지지요.”

그는 몇 점 작품에 담긴 글 뜻을 풀이하는데, 들어보니 그 뜻들이 여간 웅숭깊지 않다.

먼저 중국 초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시 한 수를 보자.

위안스카이의 시를 새긴 목서각
위안스카이의 시를 새긴 목서각 ⓒ 전영준

이 시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 살해하자 이에 크게 감복한 위안스카이가 안 의사의 쾌거를 기려 지은 시로써 안 의사의 후손들조차도 잘 모를 정도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라는 류 원장의 설명이다.

平生營事今日畢 / 死地回生非丈夫 / 身在三韓名萬邦 / 生無百歲死千秋

[평생 동안 생각한바 큰일을 오늘 마쳤다 / 죽는 곳에서 머뭇거리거나 돌아오는 것은 장부의 뜻이 아니리라 / 몸은 삼한(조선)인으로서 그 이름은 만방에 떨쳤다 / 비단 사람이 나서 백세는 못산다하나 죽음으로서 천추에 빛을 내었다]


엄홍도의 시
엄홍도의 시 ⓒ 전영준
또 한 점, 엄홍도의 시.

爲善被禍 / 吾所甘心

[의롭고 착한 일을 하였다하여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달게 받겠다]

이는 세조 때,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안치하였던 강원도 영월호장 엄흥도가 자손에게 남긴 유언적 글귀로 후환이 두렵다 하여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사내대장부의 길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있다.

人生不學如盲盲夜行 /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사람으로 태어나 배우지 아니하면 어두운 밤길을 거니는 바와 다름없다 / 황금 백만 냥이 있다한들 자식을 가르치는 일보다 못하다]


이밖에도 좋은 글이 무수히 많으나 이를 다 풀기에는 마냥 흐르는 시간이 아쉽다. 나머지는 또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

그가 소장하고 있다는 대원군의 열 폭 병풍과 소치 허유 선생의 여덟 폭 병풍, 추사 선생의 족자, 비록 매국노이기는 했어도 당대 명필이었다는 이완용의 글과 안평대군의 작품들도 언젠가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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