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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창원공단에 갓 입사했을 때의 내 고향 마당뫼와 들판
ⓒ 이종찬
덩더쿵 저절로 곱사춤 나오는
기막히게 좋은 봄날 오후
어린 처녀들은 돼지감자 찔 생각도 잊은 채
푸르른 마산 쪽 하늘 오래 바라보다가
소처럼 큰 눈을 반짝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김주열이 건져낸 마산 앞바다에
왜놈들이 까마구떼처럼 건너와
죽은 아이 몰래 버리던 갈대밭을
자기네 땅처럼 처억척 메웠단다
그 위에 학교보다 훨씬 큰 공장들을
손가락 셀 수 없이 지어놓고
중학교 졸업장 있는 아가씨들은
줄만 서면 취직시켜 준단다
자유수출인가 구경 한번 할려면
부랄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돌아도
몇날 씩 걸린단다며
어제 미드덕 받으러
어시장 다녀온 진해댁이
보리밥 되는 미드덕은 팔 생각을 않고
새세상 온다며 나발 불고 다녔단다
마을 처녀들은 바람끼 난 과부처럼
작은 가슴이 자꾸 부풀어 올랐고
마을 어른들은 보리밭 메던 쇠스랑을 들고
마산쪽 하늘 바라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소리 '소문' 모두)


사람의 욕심이 멈추지 않는 한 대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지 간에. 하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더 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공업단지 조성은 천연적인 자연의 혜택과 아름다운 풍경을 빼앗아가버리는 등 그 부작용 또한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의한 공업단지 조성이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중화학공업단지 조성과 수출공단 조성의 경우는 거대한 자본과 수많은 인력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배후도시의 건설 등 더욱 많은 문제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1974년, 창원공단이 들어설 때 창원은 123.36 평방킬로미터의 광범위한 땅에 공단부지 및 시가지로 지정된 땅이 1470만 평이었다. 그 밖의 땅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못박았다. 창원은 1986년까지 공장 수 210개에 도시 인구 오십만 명이 쾌적한 환경을 누리며 생활할 수 있게 한다는 박정희 정권의 야심찬 계획하에 생겨났다.

당시 5년 주기로 경제개발계획을 내세운 박 정권은 창원공단에서 국가군수물자 조달 및 국내 수출의 40%를 담당하게 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약속의 땅, 미래의 도시란 이름을 내걸고 창원 한가운데를 직선으로 가로질러 공단대로를 뚫었으며, 공단대로 서쪽에는 창원공단을, 공단대로 동쪽에는 창원시가지를 만들었다.

가까운 마산의 경우, 수출자유지역(지금의 자유무역지역)은 1970년 3월, 수출을 늘려 불황에 허덕이는 국가경제를 일으킨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달고 들어섰다. 특히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하는 일본기업의 경우, 5년 동안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재료, 자본, 기술, 인력을 마음껏 동원하여 제품을 생산, 판매할 수 있다는 특혜를 베풀었다.

그 대신, 우리나라는 근로자 취업기회를 확대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일본의 고급기술을 배워 기술인력을 양성한다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또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일본 기업들은 박 정권과 계약한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장과 공장설비 일체를 우리나라에 헌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사양산업으로 밀려난 그 설비 일체를 말이다.

광활한 갈대밭과 아름다운 마산 앞바다의 대부분을 메우고 양덕동과 합포동 일대에 들어선 수출자유지역은 일본에서 전자분야를 주로 다루는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수출자유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삼만 명을 웃돌았으며, 그중 이만 오천 명이 14세에서 23세에 이르는 어린 여공들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창원, 마산, 진해는 모두 창원군에서 태어난 시였다. 창원군은 옛 금관가야의 땅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쳐진 뒤 굴자군으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경덕왕 때 의안군으로 불리다가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가 들어서면서 잠시 김해군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어 의창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비로소 창원군이 되었다.

창원군은 그 뒤 진해시와 마산시를 독립시키고, 창원군 안에 중화학공업단지의 조성으로 창원시가 탄생하자 자기 이름까지 내어준 채 옛 고려시대의 이름인 의창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창원시와 나란히 창원군으로 불리워지다가 마침내 창원시와 마산시에 모두 포함되고 말았다.

신라시대 '골포'라는 아주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던 마산은 1274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꿈꾸며 정동항성을 쌓을 당시, 군사들과 함께 마셨다는 '몽고정'과 함께 서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산이란 이름은 1760년 영조 36년에 이곳에 조창을 설치하면서 '마산창'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마산'이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90여 년 전부터다. 그러니까 1899년 일제에 의해 '마산포'가 개항하고, 그로부터 15년 뒤였던 1914년에 비로소 '마산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가까운 진해시 또한 마찬가지다. 1900년 러시아가 한반도의 남해안에 해군기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마산항에 나타났다. 그 뒤 러ㆍ일 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자 일제는 마산항을 폐지하고 진해에다 해군기지를 만들었다.(진해는 지금 진동의 옛이름) 군항도시, 벚꽃도시로 불리는 진해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지금도 마산 월영동 일대에는 러시아 사람의 이름으로 된 땅이 4199평이나 남아 있으며, 당시 창원시에 이름을 빼앗긴 의창군 청사도 러시아 사람들이 지은 건물을 사용했다. 창원, 마산, 진해는 한국전쟁 때에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도시였으나 그때부터 온갖 밀수가 성행하기도 했다.

창원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할 만한 분지의 땅이다. 서북쪽으로 천주산, 동남쪽으로 불모산, 동북쪽으로 정병산, 서남쪽으로 장복산이 둘러싸고 있고, 장복산 끝자락 사이로 마산 앞바다의 끄트머리가 약간 닿아 있어 예로부터 외부의 침략을 모르고 살았던 조용하고도 인심 푸근한 땅이었다.

하지만 창원공단 조성과 함께 주택 부족으로 집값, 땅값이 제멋대로 치솟아 노동자들의 생활고가 몹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창원공단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창원의 인구는 15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상도청까지 들어섰던 창원시는 도시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창 도시가 형성되고 있었던 탓에 소주라도 한 병 사려고 하면 1킬로미터에서 2킬로미터 정도를 걸어갔다 와야 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따라서 눈치 빠른 사람들이 주택가 안에 담배가게나 식료품 가게 등을 차리는 바람에 가게의 35퍼센트가 무단 점포였다.

관계기관에서도 단속을 많이 했다. 하지만 창원공단 조성으로 조상 대대로 지어오던 농토를 잃고 도심으로 밀려난 도시 주민들은 집만 지어 놓으면 무엇으로 먹고 사느냐고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다. 게다가 무작정 농토를 밀어붙여 놓고 허허벌판이 된 상가지역은 아예 채소밭으로 변하기도 했다.

지금 창원은 춘천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힐 만큼 시가지가 잘 꾸며져 있고 인구 또한 52만 명을 웃돌고 있다. 노동현실 또한 내가 공장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그 개선은 1970~80년대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한 현장노동자들의 고된 세월과 가열찬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현장노동자들은 예전에 내가 공장에 다닐 때처럼 식의주만 걱정하는 그런 배고픈 노동자들이 아니다. 현장노동자들은 이제 선진화 된 현실만큼이나 의식 또한 선진화 되어 있으며, 불평등에 당당히 맞설 줄 아는 노동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노동현장에는 비정규직 문제 등 수많은 난제가 쌓여있다. 이러한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현장노동자들 스스로 주변 노동자들에게 처한 어려움이 곧 자신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인식하고 노조 간의 유대를 더욱 확고히 해야만 할 것이다.

현장노동자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임금인상 요구나 근로조건에 대한 개선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랑스런 현장노동자들은 한발짝 더 나아가 그들을 근본적으로 옭죄고 있는 노동법을 개정하고 국제 노동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 이제는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동료들의 노동현장으로, 국내 노동현장에서 국제적인 노동현장으로 나아가자. 그리하여 그들과 어깨에 어깨를 걸고, 때로는 투쟁으로, 때로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 주인된 자리를 탄탄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현장노동자들의 앞날에 노동해방의 꿈이 알알이 영그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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