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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고2)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 한라수목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글을 써낸 사람은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 째 학생이다.
지난 해(고2)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 한라수목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글을 써낸 사람은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 째 학생이다. ⓒ 김우출
2001년 따스한 봄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어느 날이었다. 이 날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아침 등굣길에 좋아하는 누나도 만나고, 학교에서는 내일 소풍간다고 오늘 수업을 4교시까지만 했다.

나는 학원에 전화를 했다. 내일 소풍가기 때문에 장보기 하느라고 오늘 못 간다고 하고 땡땡이를 친 것이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오늘은 특이한 날이다.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가 내일 가져갈 짐을 챙겼다. 기분 좋게 TV를 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학원 원장 선생님이 전화한 거 아니냐?'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때보다 전화벨 소리가 더 급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점점 굳어지는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전화를 끊으셨다. 형은 지금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나를 지켜줄 사람은 엄마뿐이다. 나는 빠른 움직임으로 엄마에게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엄마와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나는 '이제 나를 지켜줄 사람은 없구나!'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방에 들어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아버지께서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나오셨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어디 좀 갔다올게 형이 올 때까지 문 잘 잠그고 집에 있어."

두 분은 훌쩍 떠나갔다. 나는 속으로 '아싸! 혼자다'를 외치며 컴퓨터를 켰다. 얼마 후 형이 왔다. 가족과 함께 먹겠다고 떡볶이를 사왔다.

나는 4인분이나 되는 떡볶이와 순대를 형과 둘이서 다 먹었다. 식곤증이 와서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엄마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규야! 방금 할머니 돌아가셨다. 내일 학교 가지말고 형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다 목놓아 울었다.

형은 '왜 그러느냐?'면서 계속 물었고,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울었다. 잠시 뒤에 진정이 되어 그러나 아직 우는 목소리로 형에게 말했다.

"혀 형아, 흑흑흑…, 할 할머니…할머니가 금방 돌아가셨대."

형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장난치는 거냐?"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울었다. 형은 다시 물었다.

"지금 전화가 엄마였어? 엄마가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빠른 손놀림으로 엄마 핸드폰 번호를 눌렀고 바로 형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동규가 한 말 뭐야? 엄마, 지금 어디야?"

그러다 형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형은 뒤 돌아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옷 입어! 지금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온대" 라고.

형은 약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얼마 전에 산 검은색 정장을 입었고, 나는 검은 티에 검은 바지와 검은 잠바를 입었다. 곧 아버지께서 오셨다. 아버지도 울었나 보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후, 그 때 아버지께서 우시는 것을 처음 봤다. 우리 삼부자는 차를 타고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마당 입구에는 초상난 집 앞에 매다는 등불이 걸려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갑자기 할머니와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치매에 걸리셨다. 그래서 그 때 나는 할머니가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께 혼나고 나서부터 할머니께 잘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동규야, 호두 좀 까라."

난 이 말을 듣고 정말 놀랐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왜냐하면 치매 걸리고 나서 처음으로 가족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게 나였다는 사실이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어머님 저 알아보시겠어요?" 라고 하자 할머니는 "니가 누군데?" 라고 했다. 그리고 사촌 누나가 "할머니, 나 보영이야. 나 몰라?" 하고 묻자 할머니는 귀찮은 듯이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며 "동규야! 빨리 호두 좀 까다오!" 하시는 거였다.

나는 망치로 호두를 까드렸고, 할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 몇 시간 뒤부터는 다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동규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 준 건데 그 이름지을 때 몇 날 밤을 옥편만 붙잡고 있었었지…. 그래서 니 이름은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날부터 할머니를 뵐 때마다 극진히 모셨다. 나는 새삼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지금 현실에 돌아와서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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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영주고등학교, 선영여고 교사. 한국작가회의 회원. 대경작가회의, 영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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